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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일 나의 부고기사를 쓰게 된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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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강일구]

김승희 시인의 ‘한국식 죽음’이라는 시가 있다. 망자의 이름은 없고 잘나가는 모모씨의 부친상·빙부상 등으로 소개되는 부고기사를 그대로 시로 옮겼다. ‘김금동씨(서울 지방검찰청 검사장), 김금수씨(서울 초대병원 병원장), 김금남씨(새한일보 정치부 차장) 부친상’으로 시작되는 시의 마지막 구절은 ‘그래서 누가 죽었다고?’다.

 죽은 자의 지위는 자식에 의해 결정되고, 사람들은 망자보다 산 자를 보고 상가에 들르며 부조금을 낸다. 사실 이건 부고기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장례식이 자식들의 사회적 지위, 권력 관계를 확인하는 장이 되는 우리 장례문화 자체에서 온 문제다.

 여성의 경우라면 더욱 심하다. 역시 김승희 시인의 시 ‘한국식 실종자’는 같은 자손이라도 직업 없는 딸이나 며느리들은 부고란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하는 현실을 비튼다.

 반면 서구의 부고는 고인을 앞세운다. 짧지만 전기처럼 일생을 정리하거나 자손들의 추모를 담는다. 보통 사람들은 유료로 지면을 사기도 하는데, 조문객을 위한 단신성 정보인 우리와 달리 고인에 대한 추모글로 꾸며진다. 평범하지만 위대했던 각각이 조명된다.

 최근 미국에선 스스로 부고기사를 쓰고 존엄사를 택한 제인 로터가 화제였다. 유머칼럼니스트답게 유머감각 넘치는 글을 남겼다. 그녀의 남편은 한 인터뷰에서 “제인은 삶을 사랑했기에 부두에 널브러진 생선같은 모양새로 삶을 끝내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근 만난 한 문화평론가는 죽음을 연구하는 모임에 나가고 있다고 했다. 철학적인 토론뿐 아니라 죽음의 유형과 죽을 때 신체 반응 등에 대한 의학 공부를 함께 한다. “특별히 자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 준비나 지식 없이 어느 날 찾아오는 죽음을 일방적으로 맞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다.

 삶의 풍경이 다채로운 만큼 죽음의 풍경도 다채롭고, 내 삶의 마지막 장면만큼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준비하고 싶다는 뜻이다. 죽음을 알면서 죽고 싶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빼어난 문장가이기도 하니 아마 그가 자신의 부고기사를 쓰게 된다면 그 또한 명문이 될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자신의 죽음과 장례 절차 등을 ‘엔딩노트’에 쓰며 준비하는 붐이 일었다. 국내에도 소개된 다큐 ‘엔딩노트’가 계기였다. 주인공인 아버지는 ‘엔딩노트’를 마무리하고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눈을 감는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은 “이렇게 모이니 바로 여기가 천국이구나”였다.

 난 어떨까. 내 삶의 마지막 장면은 무얼까. 그리고 내가 만약 나의 부고기사를 쓴다면 뭐라고 쓰게 될까. 때론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잘 죽는 것은 물론이고 잘사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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