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4)물동이의 질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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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비가 흠씬 와주었으면 싶다.
어쩌다 하늘이 흐리기만해도 그런 기대에 부풀지만 감질나는 비는 후두둑 후두둑 지붕만 노크하고 지나가 버린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 갈현동 새 주택지. 서울시의 상수도가 미치지 않는 곳. 비가 많이 내려 우리의 부엌에까지 물줄기가 닿지않는 한 서울시의 급수차에 언제나 기대야할 형편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흘에 한번, 나흘에 한번씩 오던 급수차에 우리들 주부들은 머리를 싸매고 물동이를 들이대 그때마다 아귀다툼을 치러야 했었다.
급수차가 횡하니 떠나버리면 이웃끼리의 아귀다툼이 쑥스러워 외면들을 하고 혹은 연장전까지 펴곤해서 살벌한 분위기마저 감돌곤 했었다. 그런 어느날 우리들 몇몇 주부들은 질서를 잡자고 이런 개선방안을 마련하고 이튿날부터 실천에 옮기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것은 우리 이웃집이 가지고 있는 비슷한 규격의 물동이를 징발, 한집에 두 개씩 배정하고 거기에 페인트칠로 일련번호를 매겨 급수차가 오면 번호순으로 돌아가며 받기로했다.
이웃들은 모두 찬성을 했고, 배신자는 급수대열에서 추방하기로 다짐들을 한 것이다.
첫날부터 효과는 좋았다. 골고루 물을 받을 수 있었고, 짜증도, 얼굴 붉힘도, 욕심도, 또 배신자도 없이…그리고 이웃끼리의 분위기도 극히 호전되었다. 심지어 바쁜 일로 물을 못받는 이웃엔 대신 받아주는 미풍까지 생겨날 정도로.
급수차를 몰고 온 시청직원도 노상 우리에게 감사하고있는 형편이고 우리들 주부등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급수차만 기다리고 이런 어쩔 수 없는 질서에 순종만하고 있어야 하는 가고 자문해보면 한숨섞인 웃음이 난다.
제발 비가 흠씬 흠씬 쏟아졌으면 이런 도시생활을 안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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