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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성종 2년에 처음 세웠던 포도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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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시민생활에는 도둑의 이야기가 언제나 따르게 마련 이조5백년 동안에도 각종 도둑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이조초기 80여년 동안은 그래도 비교적 잠잠한 편이었는데 성종 때(1470년대)부터 경향각지에 도둑이 들끓기 시작, 시골은 물론 서울 한복판에서도 도둑 떼가 횡행했다. 특히 웬만한 산에는 산적 떼가 국도를 차단하고 통행세를 받을 정도. 이에 대한 국가적인 대책이 필요하게 됐다.
이래서 태조이래 의금부에서 부대적으로 관장하던 포도 금란 순작 등 경찰업무를 독립된 기관에서 관장, 강력하게 치안질서를 바로잡자는 여론이 일어나 성종2년(1471년)에 처음으로 포도청이 신설됐다.
이때 포도청은 좌우두개의 청으로 설치, 좌 포청은 서울의 동부·중부와 경기도 남쪽을 관할했고 우 포청은 서울의 서부·북부와 경기도 북쪽을 맡았다. 오늘날 광화문우체국자리에 우 포청, 단성사자리에 좌 포청이 있었다.
두 포도청에는 각각 포도대장 1명, 포도군관 10명, 종사관 3명, 포도부장 3명, 포도군사 64명이 정원.
우 포청 건너편에는 전옥(교도소)이 있어 포도청에서 잡아 넘기는 죄수들을 가두었다. 이 전옥은 일정 때까지도 현 광화문우체국 옆에 남아있었다.
이들 포도청의 권한은 강·절도의 체포와 순찰을 도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외에 밀도살 도장과 관공서의 증명서위조, 쌀에 모래 넣기, 화폐위조, 사학, 무당·잡기 등 단속, 화간에 이르기까지의 각종간통, 물가조작, 사기 등등.
그러나 포도청의 집중단속 목표는 시대에 따라 바뀌었다. 성종 때는 서울 시내의 명 화적, 중종 때는 도박, 명종 때는 산적, 선조 때는 사람잡아먹는 사람 잡아죽이기(그 당시는 인육이 유행했다), 순조 때는 천주교신도 잡아들이기, 고종 초기에는 밀주단속, 중기에는 경복궁 짓는데 원납전안내는 부자들을 잡아다 족치기 등으로 역점이 옮겨졌다.
어쨌든 성종이 즉위하자 도성 안에 밤낮으로 연일 불이 일어났다. 민가에 불을 놓고 북새통이 벌어지는 사이에 불난 집과 그 이웃을 터는 명 화적들의 소행이 빈번했다.
성종은 포도청을 신설한 후 명 화적들을 쉽게 눌러버렸지만 또 하나 큰 골칫거리가 생겼다. 포도청직원들이 멀쩡한 민간인을 도둑으로 몰아 편달하고 재물을 뜯어내는 행패가 많아 오히려 명 화적들보다 피해가 심했던 것. 성종5년 도승지 이숭원 등은 포도대장 이양생을 탄핵, 포도청직제를 아예 없애버렸다.
그러나 2개월이 지나기 무섭게 도둑 떼가 들끓어 다시 포도청을 복설 했다. 그후 중종 때까지 복설·폐지를 거듭하기 6차례, 어디까지나 필요할 때만 설치하는 임시 권설기관이었다. 또 포도청정원도 80명에서 많을 때는 5백명까지 늘어나기도 하고.
이러다가 상설기관으로 확립된 것은 명종 때. 우리 나라 역사상 대도중의 대도 임거정 사건이 고비였다.
당시 흉년이 계속 들고 관리가 부패할 대로 부패하자 양주 땅 백정출신으로 힘이 장사고 간특한 지혜가 많았던 「꺽정」은 명종14년(1559년) 황해도 구월산에 본거지를 정하고 도당을 모아 경기·강원·황해 3도의 산천과 길목을 거의 모두 점령, 4년간 내란을 방불케 했다.
산적들은 정부에서 포토사로 파견한 포도부장과 그 부하들을 몰살하고 개성을 점령하는 등 엄청난 세력이었다. 더욱이 서울시내에 잠입해 부패관리들의 집을 습격하기까지 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포도대강 남치근을 포토사로 특명, 3도의 군사를 동원해 구월산을 포위, 소탕을 하기도 했다.
이런 큰 홍역을 겪고서는 『부작용이 많으니 포도청을 폐지하라』는 말은 쑥 들어갔다. 이후 임진란이 끝난 다음 전국에 무서운 산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남원의 김희, 영남의 임걸년, 양주의 이능수, 이천의 현몽, 춘홍산의 송유진, 호남의 고파 강대수 등은 악명 높은 산적두목들. 특히 이몽학은 꺽정에 비견할만한 대도였다. 이들을 퇴치하는데는 임란 때의 명장 정기룡·김응서 등이 포도대장으로 출전했지만 여러 차례 실패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포도청의 권한은 확대되고 권한 남용도 심해졌다. 이조 때 경찰업무는 원칙적으로 서울과 경기는 포도청이, 지방은 관찰사와 진영장이 맡았고 또 각 관서에서는 관할범위내의 범법자들을 별도로 다스렸다.
이렇게 좀도둑에서 산적 떼까지 토벌해오던 포도청은 고종31년(1894년) 「경무청관제직장」이 공포되면서 폐지됐다.
그후 일정 때 두 포도청건물은 헐리고 극장, 우체국이 들어섰는데 오늘날은 주춧돌 하나 남지 않은 기록상의 유적이 되고 말았다.<손석주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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