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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가장 길었던 3일(21)|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백선엽 대령의 제1사단을 기습 공격한 괴뢰군 부대도 역시 제1사단이었다. 여기에 옹진반도를 침공한 괴뢰군 제6사단의 2개 연대가 합세하여, 병력 비율은 2대 1로 적이 우세했다. 한국군 제1사단도 다른 사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침 제일 격에 전초방위선이 무너졌다. 특히 개성방면에 포진했던 전성호 대령의 12연대는 지형이 불리한데다가 적의 협공을 받아 심한 타격을 받고 후퇴했다.

<피아가 다같이 제1사단>
미국의 전사가 로이·E·애플먼 저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South to the Nakong North to the Yalu)에는 12연대의 피해상을 『개성과 연안에 배치되었던 한국군 12연대의 대부분은 상실되었거나 포로가 되었고 사단사령부에는 다만 2개 중대만이 보고되었다』고 기술돼 있다.
제1사단은 서쪽으로는 청단에서 연안·백천·개성을 거쳐 동쪽 고랑포·적성에 이르는 폭90km의 방위를 담당하고 있었다. 1개 사단으로서는 너무나 방위 폭이 넓은데다가 적이 무려 배나 되는 병력으로 기습했으니, 방위 제일선이 쉽게 뚫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하에서도 서부전선의 제1사단이 춘천방면의 제6사단과 더불어 개전 초에 비교적 잘 싸웠다는 것은 내외자료와 회견한 증인들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

<1사단 24일부터 경계 태세>
제1사단 13연대장 김익렬 대령(현 사업·51)말을 들어보면 백 사단장 부임 후 축성공정에 중·고교생까지 동원, 실시하여 5월말에 완료했으며 이것이 적침을 일시나마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고 당시 종군기자였던 최기덕씨는 자기가 기억하는한 1사단과 6시단이 6월24일부터 준경계 상태를 취한 것으로 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외국자료인 「T·R·페런바크」저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을 통해서 제1사단이 어떻게 싸웠는가를 살펴 보자.
『「다리고」 대위를 깨운 적 포격은 개성북방의 방위선을 돌파했다(주=본 연재 3회 참조). 한국군 제12연대는 2개 중대만이 임진강을 건너 후퇴할 수가 있었다.
1사단의 나머지 연대인 제11, 13연대는 고랑포 일대를 지키고 있었다.
수색에 사단본부를 두고있는 백 대령은 참모와 함께 다리고 대위의 상관인 고문관 「로이드·로크웰」 중령에게 적진 소식을 전했다. 백 사단장은 즉시 예비 연대로 있던 최경록 대령의 제11연대에 전화를 걸어 문산 북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백 사단장은 로크웰 중령과 잠시장의 한끝에 제1사단은 임진강 남쪽에서 적 공격을 막기로 했다. 그래서 백 사단장은 곧 임진강으로 가서 다리를 폭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후퇴하는 제12연대의 뒤에 적이 너무나 가까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다리를 폭파할 수 없었다.

<임진강 다리 폭파에 실패>
한국군 13연대와 11연대는 25일 9시쯤, 북괴군과 부닥쳤다. 한국군은 누구보다도 용감했다. 그러나 적 탱크를 저지할 무기가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으로부터 2·36인치 로키트 포를 공급받았지만 그것으로 소련의 장비를 막을 수 없었고, 적의 야포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군1사단은 고랑포를 지켰다.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한국군 병사들은 고성능폭발물을 안고 적 탱크 밑에 뛰어들어가 이 강철의 괴물을 저지하려했다. 적 탱크를 향해 육탄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어떤 병사들은 진격해 오는 적 탱크를 향해 폭약 주머니를 들고 뛰어갔고 어떤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탱크 위에 뛰어 올라가 망치와 도끼로 뚜껑을 부수고, 그 안에 수류탄을 집어넣었다. 평지에서 그렇게 하여 탱크를 파괴하려는 전술은 사실상 자살 행위였다.
이런 용감한 한국군의 행동으로 몇 대의 적 탱크는 파괴됐지만, 그 대신 숱한 한국군이 죽어 갔다. 그들은 적 탱크의 기관총에 맞아 쓰러지고, 괴뢰군보병의 지원사격에도 쓰러졌다. 약 백여명이 이런 방법으로 죽었을 때, 맨손으로 탱크와 싸울 욕망은 살아남은 병사로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제1사단은 그 지역에 남아 끝까지 싸워 버티었다. 동쪽에서 참패하여 부득이 철수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버티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제1사단이 적 침공 제1격으로 12연대가 심한 타격을 받았지만, 그후 투입된 증원부대와 함께 제1, 2, 3으로 구성된 종심 방어진지인 마지막 제3방위에서 일대반격을 시도하는 등 이 사단이 선전했다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제1사단의 이런 반격 계획은 전국의 전체면에서 볼 때에 무모한 작전이었다.
육본의 명령이 없는 것이 큰 원인이겠지만 적의 주 공로인 의정부전선이 무너진 이상 사단장 「독단전행」으로 한강이남으로 주력을 철수시켰어야 했다는 것이 군사 평론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명암 엇갈리는 전투비화>
백선엽 대령의 제1사단도 적과 싸우는 동안 여러 에피소드를 남겼다. 기록에 있는 대로 명과 암이 엇갈리는 몇 가지 비화를 더듬어 보면.……
제13연대의 제1대 대장 김진위 소령은 적1개 대대를 금파리 지대에 유인한 다음, 1백5밀리 포 지원 하에 전화력으로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뒤이어 약40대의 적 탱크가 침공하는 것을 보고 「육공반」을 조직, 그 중 4대를 격파했다. 이로써 적 탱크에 대한 장병의 공포심은 많이 완화되었다.
제12연대의 병력은 각 방면으로 분산 후퇴했기 때문에 임진강 선의 제2방위선에서 겨우 일부가 수습되었다. 제1대대장 신현홍 소령은 운산포로 일부 병력을 수습하여 탈출했는데 그 곳에는 많은 병력이 집결돼 있으나 선척이 없었다. 신 소령은 잔존병력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장교가 있으면 나오라고 했으나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계급장을 떼고 있었기 때문에 상하의 구별을 분간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에 어선 1척을 징발해 왔는데 모두가 먼저 타려고 혼란이 일어났다. 어떤 자가 자칭 상사라고 하면서 먼저 타려는 것을 보고 신 소령은 『아까 장교 나오라고 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는 장교냐』고 하면서 권총으로 그 자리에서 고결 처분하고, 질서를 바로 잡았다.
이런 고결 처분의 예는 제13연대에도 있었다. 연대장이 직접 목격한 이 사실을 김익렬 대령 자신으로부터 들어보자.

<적 탱크에 대전차포 무력>
『28일 하오3시쯤 수도함락의 비보를 듣고 게릴라전이냐 옥쇄냐 후퇴냐를 놓고 왈가왈부 하다가 B-29가 문산 쪽을 폭격하는 것을 보고, 후퇴해서 싸우자고 연대 결정이 났을 때입니다.
연대본부중대장 박구준 중위(전사)가 집합을 명령했어요. 이때 하사관 3명이 깔깔 웃으며 나라가 망했는데 무슨 집합이냐면서 사병들이 모이는 것을 저지했어요. 박 중위가 달려들어 30m에서 권총으로 세명을 쏘고 집합! 하고 소리치니까 곧 모이더군요. 눈 깜짝할 사이였읍니다.』
서울에서 교육을 받다가 1사단 지원차 급파된 제5사단 15연대장 최영희 대령(현 대한통운사장·49)과 동 사단 20연대 3대대 12중대 박격포 대장 정엄수 소위(현 육본 근무·대령·41)도 최후의 제3방위선인 봉일천 지구에서 육공으로 적 탱크와 대전했다.
최 대령은 대대장 최병순 소령에게 육탄공격을 명령, 각 중대에서 중대장이 앞장서서 전진, 수류탄으로 적 탱크 4대를 파괴했으나 이 공격에서 1백여 명의 사상자가났다. 최영희 대령은 『눈앞에 온 적 탱크를 보고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그때 정말 부하들이 잘 싸웠어요. 내가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 이때부터』라고 술회하고 있다. 정엄수 소위는 『교육 때 세계 어느 탱크도 파괴할 수 있다는 우리 57밀리 대전거포가 분명히 적 탱크에 명중했는데도 꼼짝도 안한 것을 보고 이가 갈렸다』고 회고하고 있다.

<전 전선 무너져 반격도 무위>
제13연대의 수색소대장 김호 소위는 봉일천 제3방위선에서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연대본부요원의 후퇴를 자진 엄호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행주로 후퇴해오다가 서울함락소식을 듣고 김홍주 소위, 고 모중위와 함께 자결했다.
이들 3명은 모두 이북출신으로 군에 들어가 북진통일을 갈망했던 것인데 전세를 비관코 자결한 것이다.
제1사단은 이때까지 열거한바와 같이 적침 제1격에 무너진 12연대를 제외하고는 잘 싸웠다. 앞서도 말한바와 같이 방위도 제1, 2, 3의 종심 방위가 제대로 돼 있어 실제로 제1사단은 28일 아침에 봉일천의 제3방위선에서 문산 탈환의 「불효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최후반격」이 오히려 백 사단에는 결과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했다. 이 경위를 당시 참모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1사단 작전지도차 나갔던 김홍일 소장 (현 국회의원·68)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채 총장에 후퇴 명령 간청>
『27일 저녁에 봉일천 사단CP에 가봤더니 비교적 선전하고 있단 말이야. 그러나 서울 북방의 전황은 통 감감소식이야. 그래서 백 사단장에게 미아리쪽 전세를 이야기하고, 전전선의 균형상 한강이남으로 철수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지.
그러나 백선봉 대령은 참모총장이 사수하라고 했는데 명령 없이 후퇴할 수 없다는 거야. 나야 어드바이스 할 자격뿐이지 명령권이 없거든. 참 안타깝더군. 그래서 27일 밤 12시쯤 서울 육본으로 와서 채 총장에게 빨리 1사단에 후퇴명령을 내리라고 간청했지만 우물쭈물해. 전화통을 그에게 주면서 졸랐는데도….』
l사단은 28일 상오8시에 부분적인 반격을 개시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결국 1사단도 28일 정오에 예하 부대에 후퇴를 명령하여 최영희 대령이 개척한 행주나루터를 통해 간신히 한강이남으로 철수했지만 개전 초기의 선전에 비해 장비와 병력의 손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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