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3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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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서 있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이영도

평소 청마 유치환과 친분이 두터웠던 큰 시인들이 잘 나가는 출판사를 앞세워 정운 이영도를 설득했는데도 한 마디로 잘랐던 정운은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을까? 모르는 사람들은 서한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나오자 잘못한 일로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정운은 시조시인으로 문단의 중심에 높게 자리 잡았거니와 사리분별이나 현실감각에 있어서도 잘났다는 사내 열 몫쯤은 하는 재덕(才德)이 있었다. 정운이 서한집 출판 제의를 모두 자르고 부산으로 내려간 뒤 우려했던 일들이 터져나왔다.

여성지들이 다투어 청마의 사랑을 취재하면서 정운에게 보낸 편지는 한 장도 못 싣고 엉뚱하게도 대구 등 이곳저곳의 여인들이 받았다는 청마의 편지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청마를 만난후 10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청하라는 여인이 나선 상황에서 정운이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아니 직접 시를 써서 편지를 대신하기도 했다.정운을 만난 지 두달쯤 되는 1946년 12월 1일 청마는 '정향(丁香)에게 주는 시'를 처음 쓴다.

정향은 정운 이전에 쓰던 이영도의 아호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아아 병인 양 오슬오슬드는지고".

두번째 시는 47년 7월 9일에 보인다. "덧없는 목숨이여/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요지경같이 요지경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노래여, 뉘우침이여". 다음은 편지를 보자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52년 6월 2일 당신의 마(馬)".

편지로 사랑을 낚던 시절, 누구라도 이 서한집에서 몇 줄만 훔쳐 써먹었으면 돌부처라도 옷고름을 풀리라. 서한집의 출간으로 여성지들도 잠잠해졌고 청마의 뒷이야기도 뚝 그쳤으니 비난을 무릅쓰고 결행한 정운의 사랑 지키기는 적중한 셈이었다.

마땅히 서한집의 인세는 청마의 유족에게 돌아가야할 것이나 정운은 시전문지'현대시학'에 '작품상'기금으로 기탁운영해오다 끝을 맺지 못하고 76년 3월 6일 예순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뜬다.

바로 그날 오전 정운은 11시쯤 내가 근무하는 북창동 5층까지 오셨었다. "근배야 잘 있거레이". 12시 노산 이은상과 점심약속이 있다면서 층계를 밟고 내려가시더니 오후 2시쯤 망원동 자택에서 부음이 날아든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갔고 내 몫으로 온 조사를 울면서 쓰고 영결식장에서 울면서 읽었다.

더 크게 만들겠다던 문학상 기금은 정운의 타계로 붇지 않고 구상.김준석.임인규 등 문학상 운영 위원들의 합의로 '정운시조상'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유서에까지 내 이름을 적어두었던 정운! 없는 글재주 예뻐하시던 그 사랑 뉘에게 다시 받을까!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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