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 없는 가계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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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꿈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꿈만을 먹고 살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맛있는 스프로 살고 있는 것이지 훌륭한 말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몰리에르가 말한 적도 있다.
사람이 빵을 먹는 것은 배부른 창자 속에서만 꿈이 자라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삶의 재미를 얻기 위해서 꿈을 찾고, 이를 위해서 빵을 먹고, 빵을 얻기 위해서 사람은 일을 한다.
그러나 『빵만 있으면 웬만한 슬픔은 다 견딜 수 있다』는 세르반테스의 비곤 말을 그대로 밀고 어느 사이엔가 배불리는 데에만 관심을 쏟게 되는가보다.
물론 배가 너무 부르면 꿈이 자랄 자리가 없어진다. 또는 너무 배를 채우는데 기진맥진해서 꿈을 키울 여력이 없어지는 수도 있다.
어느 여성단체에서 최근에 발표한 「적자 없는 가계부」를 보면 월수 2만원의 3인 가족도 3천 원씩의 저축을 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여기서보면 식비가 총 가계의 38%를 차지한다. 이 정도로 배를 채울 수 있다면 꿈도 자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꿈과 직결되어 있어 보이는 문화비며 교육비를 보면 꿈의 숨통은 전혀 막혀 있는 것 같다.
여기서는 문화비는 3%밖에 되지 않는다. 이 비율은 선진국의 가정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낮다. 책 한권 사볼 여유도 없다. 영화구경도 1년에 한번밖에 가보지 못하게 된다.
그나마 이 가계부는 자기 집인 경우를 생각해서 짜낸 것이다. 따라서 아파트나 셋방인 경우면 문화·교육비는 더 줄이는 도리 밖에 없다.
주린 배를 갖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실제로 2만원 정도의 수입으로 책을 사보겠다는 것은 너무 사치스런 생각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정상적인 월수만을 갖고 사는 사람도 드물다. 그것만을 갖고 살겠다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적자 없는 가계부」란 아무래도 기적 같이만 보인다. 그래서 배를 채우는데 기진한 사람들이 꿈 대신에 기적들만을 키워 나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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