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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대신해 드립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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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 9일 서울 광화문에서 대학생 김모씨가 대리 시위를 하고 있다. 김씨는 얼굴을 가리는 조건으로 촬영에 동의했다. [이유정 기자]

지난 9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 경기도 소재 대학 4학년 김모(28)씨가 ‘동물학대는 명백한 범죄입니다’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했다.

 언뜻 보면 동물보호협회 회원 같지만 김씨는 돈을 받고 시위를 대행하는 ‘알바생’이었다. 김씨는 지난달 다음 아고라에 “시급 5만원에 1인 시위를 대신 해주겠다”는 글을 올렸다. “생활비가 궁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정치적 성향의 시위는 리스크가 뒤따르니 수당을 더 달라”는 내용이었다. 김씨가 남긴 전화번호로 기자가 1인 시위를 의뢰해 봤다. 취재는 종로 경찰서의 협조로 진행됐다.

1인 시위 경험이 많다는 김씨는 “피켓 크기를 최대한 크게 만들라” “문구는 자극적으로 하라”는 조언을 했다. 김씨에 따르면 글을 올린 지 보름 만에 10여 통의 문의 전화가 왔다. 그는 “목소리는 내고 싶지만 앞에 나서길 꺼리는 개인을 대신하고 돈도 벌 겸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근 시위·집회에서 돈을 주고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3~4년 전부터는 알바천국과 알바몬 등 구인·구직 사이트에 공개 모집하는 추세다. ‘대리 시위’ ‘집회 알바’ 등 키워드를 치면 ‘목소리 큰 남녀 모집’, ‘박수·구호 잘 따라해야 함’ 등의 조건이 붙은 모집 글을 쉽게 볼 수 있다.

모집 주체는 중소기업부터 개인까지 다양하다. 대부분 인력파견업체를 통해 모집한다. 기계설비 도소매 업체 A사는 올해 3월 시위 아르바이트생 3명을 시급 1만원에 고용했다. 올 1월 도급사가 파산하면서 3억원의 거래 대금을 못 받게 되자 관련 기업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기 위해서였다. 회사 대표 정모(43)씨는 “직원 6명의 작은 회사라 한두 명만 시위로 빠져도 업무에 차질이 생겨 사람을 고용했다”고 해명했다.

 인력파견업체 직원 정모(41)씨는 “앉아서 박수만 치면 되고 대부분 시급이 1만원 이상으로 센 편이라 경쟁률이 5대 1이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참가자는 대부분 40~50대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B업체는 “대학생은 구호나 박수를 따라하는 데 소극적이어서 업체들이 선호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르바이트 경험담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인증’하는 경우도 많다. 익명을 요구한 30대 주부는 최근 한 네이버 카페에 “두 시간 동안 피켓을 들고 걷기만 했는데 5만원을 받았다”는 내용을 사진과 함께 실었다. 그는 “글을 올린 뒤 ‘나도 해보고 싶다’는 주부들의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전했다.

 서울의 한 지역주택조합은 조합원끼리 ‘알바비’를 지급한다. 이 지역주택조합은 올 초 사업이 좌초돼 관계 당국을 상대로 조합원들이 돌아가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생업을 이유로 불참하는 조합원에겐 10만원을 걷어 시위를 대신 하는 조합원에게 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현행법상 대리 시위자를 고용하는 건 위법이 아니다. 하지만 대리 시위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앞서 서울도심 대리 시위 현장을 지나던 대학생 김지혜(27·여)씨는 “시위 당사자가 아닐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며 “속은 느낌이 들고 시위에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문대 김재광 경찰행정법학과 교수는 “헌법상 집회·시위의 자유가 금전 매수를 통한 자유까지 허용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경찰대 서정범 법학과 교수는 “‘대리 시위’ 현상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우리 사회의 후진적인 집회 문화가 변질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유정 기자, 손승민(항공대 경영학과)
손수용(서강대 독일문화학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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