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아름다워] '행복지킴이' 김현옥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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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옥씨가 직접 쓴 서예 작품.

“처음에는 봉사라는 것이 그저 남을 돕는 일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봉사는 남을 돕는 것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성장시키는 또다른 매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또 그 속에서 얻는 보람과 감동은 덤이라고 것도요.”

18년간 봉사활동하며 어르신들 지혜 배워

스스로를 ‘행복지킴이’라고 말하는 김현옥(52)씨는 18년 동안 한결같이 지역 노인들과 소통하며 노인들의 정서 안정을 위해 서예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해왔다.

하지만 현옥씨의 봉사활동이 처음부터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시절 손 글씨를 참 잘 쓴다는 담임교사의 칭찬 한마디에 서예를 처음 접하게 됐다는 현옥씨는 재미 삼아 붓글씨를 쓰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서예 공부에 푹 빠졌다. 타고난 재주가 있어 현옥씨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고 경기도 광명시에서 열린 서예대회에서 광명시장상을 받는 등 그 실력도 인정받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편안하게 붓글씨를 쓸 수 있는 여유가 없어져 한동안 붓을 손에서 놓아야 했다.

 “붓글씨를 쓰고 있으면 어느새 잡념이 없어지는 걸 느껴요. 그리고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내 시간이라는 행복감이 붓글씨를 계속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가사 일에 육아까지 여유가 없어 붓글씨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또다시 붓글씨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어요.”

 그래서 현옥씨는 편하게 붓글씨를 쓸 수 있는 곳을 물색하다가 우연히 정보지를 통해 천안시 노인종합복지관에서 노인들에게 붓글씨를 가르칠 사람을 구한다는 구인 광고를 보고 무작정 찾아가게 됐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붓글씨도 마음껏 쓰고 어르신들에게 봉사활동도 할 수 있다고 하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냐 싶어 봉사활동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그다지 순수한 목적이 아니었죠.(웃음) 하지만 한해, 두 해 지나면서 붓글씨를 쓰고 싶었던 욕망은 차츰 사라지고 어르신들과 진심이 통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어요.”

 하지만 현옥씨는 노인들에게 붓글씨를 가르치는 동안 봉사의 기쁨보다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보험설계사라는 직업 특성상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갖가지 일들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노인들에게 붓글씨를 가르치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스트레스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삶이 힘들고 버겁게 느껴질 때에도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노인들의 모습을 보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또 남들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늦은 나이에도 열심히 운동하고 취미생활을 즐기는 노인들을 보며 현옥씨 자신도 어떠한 역경과도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고 한다.

 “30대 중반의 다소 어린 나이에 봉사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참 서러운 일도 많고 힘든 일도 많았어요. 하지만 어르신들에게 붓글씨를 가르치다 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어르신들의 지혜를 배울 때가 많았어요. 요즘 말로 ‘힐링’을 했다고 할까요. 그래서 생각했죠. 어쩌면 내가 어르신들에게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르신들이 나를 보살펴 주시는 건 아닐까 하고요. 그때부터는 어르신들에게 봉사활동을 한다는 건방진 생각보다는 어르신들의 친구라는 생각으로 노인종합복지관을 찾게 됐어요.”

 노인들에게 진심을 다해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했던 현옥씨의 마음이 통한 것인지 시간이 갈수록 노인들의 붓글씨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때로는 붓글씨를 쓴 후 액자까지 만들어 선물하는 수강생도 생겼고 또 어떤 이는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손자에게 애국가를 붓글씨로 작성해 선물로 보내주는 등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감동 받는 일화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처럼 감동과 보람이 충만한 일임에도 현옥씨는 간간히 노인들을 위한 봉사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고 한다.

 “붓글씨를 가르치면서 ‘다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어르신들이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친구처럼 지내온 어르신들의 사망 소식을 접할 때면 며칠 동안 쉽게 잠을 청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슬펐기 때문이에요. 며칠 전 까지 만해도 함께 웃으며 붓글씨를 썼던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은 그야말로 믿기 힘든 일이었어요. 하지만 붓글씨 선생을 그만두면 어르신들이 얼마나 적적해 하실까 하는 생각에 다시 나가고, 다시 나가고 한 것이 어느새 18년이나 지나고 말았네요.”

`행복지킴이` 김현옥씨가 자신의 사무실에서 붓글씨를 써보이며 기념촬영을 했다.

제대로 봉사하고파 사회복지 석사 학위 취득

붓글씨를 가르치면서 현옥씨에게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오랜 시간 봉사활동을 해오며 가지고 있는 재능만으로 봉사활동을 할 것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아 제대로 된 봉사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현옥씨는 지난 2005년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바쁜 시간을 쪼개 호서대 사회복지학과 석사 과정에 도전했고 지금은 어엿한 석사가 됐다. 또 석사 과정을 밟는 동안에도 지역 내 장애인 단체나 복지시설 등을 방문하며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쳤다. 오랫동안 남모르게 해오던 현옥씨의 봉사활동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주위의 추천으로 천안시장상과 충남도지사상도 받았지만 정작 현옥씨는 상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늦은 나이에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것은 봉사활동을 좀 더 체계적으로 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어요. 지금은 막연하게 봉사활동에 큰 뜻이 있는 사람들과 복지센터 등을 설립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나누고 있지만 그 꿈이 언제 실현될지는 몰라요. 하지만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결같아요. 그래서 언젠가는 그 꿈이 이뤄질 것이라고 믿고 있고요.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은 작을지 모르지만 이들의 힘이 모아지면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어요.”

 봉사를 통해 남을 사랑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됐다는 현옥씨는 오늘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전해주기 위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

글·사진=최진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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