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선진국 되려면 아직 멀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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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처참한 지옥'은 대구 중앙로역이 아니다. 바로 우리 내면에 있다. 만연된 생명경시 풍조를 바로잡지 않는 한 대형 참사사고는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 두번째의 대형 지하철 참사'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대구 지하철 사건은 세계 12위 경제대국이라는 물질적 위상과 월드컵의 진정한 승자라는 정신적 자부심을 한순간에 날려버리고 말았다. 뼈대만 앙상한 고철 전동차의 흉칙한 몰골은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세계 언론들의 "한국은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여 이제라도 우리 사회가 생명존중의식으로 거듭나기를 촉구한다. 그간 우리는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오직 앞만 보며 질주해 왔다. 이윤극대화, 경제성, 효율성 같은 가치가 중시되며 '빨리빨리'로 대변되는 조급증과 물질만능주의에 너나 없이 빠져들었다.

'돈만 많이 들고 효율성은 없는', 그래서 안전은 항상 뒷전이 됐다. 그렇게 밀려난 안전이 바로 우리들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부메랑이 돼 돌아왔다. 사람의 목숨값을 가장 싸게 여긴 탓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바로 사람의 생명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느냐에 달렸다.

세상을 원망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죽고 싶었다"던 방화범의 비뚤어진 의식, 비상구를 안내하는 야광표지판 하나 없는 지하철 역사의 무신경, 화재에 유독가스를 내뿜는 내부재를 버젓이 사용하는 전동차, 겉치레식 비상훈련에 익숙한 둔감함…. 대구 지하철사고의 원인들은 조금씩 얼굴만 다를 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개치고 있다.

1백20여명의 안타까운 생명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애통해 하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한다. 생명을 경시하는 나라에 태어난 이유로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같은 희생이 더 이상 이 나라에서 없어야 한다. 돈보다는 생명존중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아 모든 면에서 확실하게 안전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 더 이상 헛된 죽음이 나와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