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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태엽시계의 탄생 … 근대 유럽을 일으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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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경제사학자 치폴라는 기술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이 세계사를 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봤다. 프랑스 세밀화 ‘지혜의 시계’. 15세기 중반. [사진 미지북스]

시계와 문명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최파일 옮김, 미지북스
244쪽, 1만3000원

중세 유럽의 상인들
카를로 M 치폴라 지음
김위선 옮김, 길
152쪽, 1만5000원

역사가마다 과거를 기술하는 특유의 방식이 있다. 잡다한 사실을 엮어 하나의 거대한 체계로 만드는 자와 그런 체계를 잘게 쪼개 개별적 사실의 다양성을 밝히는 자가 있다. 그래서 미국의 사학자 J H 헥스터는 동료 역사가를 ‘덩어리 만드는 자들’과 ‘쪼개는 자들’로 분류했다. 철학에서 종합과 분석의 방법이 대립한다고 말하듯 역사가들도 성향에 따라 어느 한 쪽에만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두 방법에 모두 능통한 역사가는 없을까. 있다. 유럽 경제사의 거장 카를로 마리아 치폴라(1922~2000)가 그렇다. 그는 1995년 뛰어난 학자들에 주는 명망 높은 발잔 상(Balzan Prize)을 받았다. 발잔 재단은 이 상을 수여하며 “(치폴라는) 대단히 독창적으로 미시적 연구를 거시적 접근과 결합시켰다”고 평가했다. 어떤 역사가는 그를 가리켜 덩어리를 만들며 동시에 쪼개는 극소수의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종합과 분석의 방법을 ‘종합’하는 특출한 능력 외에도 그는 여러모로 ‘종합의 역사가’라는 칭호에 어울린다. 모국 이탈리아와 유럽 여러 나라에서 강의했던 그는 미국의 버클리대에서도 정교수로 활동하며 학문의 국제 교류를 증진시켰다.

 또한 그는 본디 역사가의 수련을 받았지만, 경제학에 대한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화폐사·농업사·인구사에 천착했으며, 위생사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게다가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해 고찰한 수필집으로도 많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최근에 그의 저서 두 권이 번역 출간됐다. 2000년 파킨슨병으로 사망한 지 10년이 지나 찾아온 그의 학문 세계에 대한 소개는 치폴라의 국제적 명성에 비해 너무 늦었으나, 한탄만 하면 더욱 늦어지리니 지금이라도 그 세계에 발을 들여보자.

 일찍이 치폴라의 중요성을 간파한 역자 최파일은 3년 전 『대포 범선 제국』을 번역한 뒤 이번에 그 후속편 『시계와 문명』을 선보였다. 이 책의 1장은 유럽에 기계식 시계가 출현한 뒤 바뀐 변화를 살핀다. 그 변화는 진기하고 흥미로운 사실로 가득하다. 원래 시계는 공공의 장소에 설치됐다.

카를로 M 치폴라

 치폴라는 태엽의 등장과 함께 시계가 개인의 소유물로 바뀌는 과정과 시계 제작 기술의 변화는 물론 그 소비와 관련된 사회 경제적 변화를 속속들이 파헤친다. 세계를 거대한 시계로 보는 세계관도 등장했다. 시계 제작 기술의 발전은 유럽에서 과학의 진보와 결합하며 과학과 기술이 서로의 성장을 촉진했다. 그 결과가 산업혁명이었으며,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게 더 놀라운 일”이었다.

 2장은 시계가 중국으로 전파된 이후를 다룬다. 다른 서양 문물과 달리 중국인들은 시계에 큰 관심을 보였다. 치폴라는 그들에게 서양 시계는 “오로지 장난감”이었다는 자료를 공들여 제시한다. 여기에서 시계와 관련된 미시적 사실에 대한 치폴라의 거시적 관점이 나온다. 인쇄술이 동양에서 발전했지만 그것을 십분 활용한 것은 유럽이었던 것처럼, 중국의 관료 체계는 “수공업자를 억압하고 응용과학과 과학 기술의 진보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봤던 것 같다. 영국의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은 중국이 다른 문명권보다 과학이 훨씬 발전했지만 중국 사회의 전통 사상과 제도 때문에 과학혁명이 일어날 수 없었다는 이론을 제시하지 않았던가. 『대포 범선 제국』에서도 치폴라는 ‘왜 중국이 우수한 대포를 만들지 못했는가’를 묻는다.

 치폴라가 『대포 범선 제국』과 『시계와 문명』을 『기술, 사회, 문화: 유럽이 기술에서 앞서게 된 이유』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은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실상 치폴라의 거시적 관점은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의 개별적인 사례처럼 보인다.

 『중세 유럽의 상인들』은 치폴라 말년의 저작으로서 역사에 대한 훨씬 원숙한 전망을 보여준다. 이 책은 14세기 초 및 17세기와 18세기에 일어났던 한 무리의 상인들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로 이루어졌다.

 14세기에 유럽의 금융계를 장악한 바르디 가문은 경제적 위기를 맞으며 파산으로 몰린다. 그들은 별 가치가 없고 산적으로 들끓는 산악 지역을 사들였다. 산적을 제거한 그들은 더 큰 산적이 되어 그 지역의 약탈권을 독점했다. 게다가 그들은 화폐를 위조해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다.

 17세기에는 프랑스 정부에서 찍은 화폐 루이지노가 터키에서 이상 열풍을 일으켰다. 터키인들이 프랑스 동전을 장신구로 사용한 것이다. 루이지노 가격이 폭등하자 제노바 상인들은 터키에서 질이 떨어지는 화폐를 제조해 팔며 문제를 일으켰다. 이득을 얻는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려던 제노바 상인들의 시도는 결국 국가 간 문제로 번지며 막을 내렸다. 저자는 상인을 위한 경제 입문서가 18세기 프랑스의 상인 가족에 의해 발간된 내막도 서술한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세 일화는 사실상 11세기에 하나의 계층으로 처음 등장한 상인들의 위상 변화를 암시한다. 원래 토지가 기반이었던 중세 사회에 상인은 침입자였다. ‘부르’라 불리던 도시의 거주자인 그들이 부르주아였다. 그들은 이윤 추구를 위해 무슨 일이든 마다 않던 무법자였다. 시간이 흐르며 부의 획득과 더불어 그들은 규범을 확립하고 사회적 인정을 받게 된다. 그들이 점차 사회를 주도하는 계층으로 성장하게 된 굵은 이야기를 몇 가지 일화로 제시하는 것이다.

 피렌체에서 역사학을 연구하는 옮긴이가 쓴 저자와 책에 대한 알찬 소개가 이 책에 대한 이해도를 한결 높여준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조한욱 한국교원대에서 역사교육을 가르치고 있다. 문화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저서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 『서양 지성과의 만남』 『역사에 비친 우리의 초상』 등. 역서 『포르노그라피의 발명』 『밤의 문화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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