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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태조가 창건한 8대문 중의 하나-수구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퇴계로와 왕십리를 잇는 삼거리 한쪽 모퉁이에 풀 포기 마저 듬성듬성 난 초라한「아치」형 돌문이 하나 있다.
훤히 트인「빌딩」가 「아스팔트」에는 하나의 흠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 문이 담고 있는 무수한 서민의 애환은 깊고 또한 끝없다.
이름하여 광희문, 또는 수구문. 속칭 시구문이라고도 부른다.
서울 도성의 8대문 중 하나로 처음 세워질 때는 광희문이라 이름 붙여졌었다. l396년 이조의 첫 임금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도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것이다.
각 방위에 따라 세워진 8대문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남대문, 동대문과 세검동을 넘어가는 북악산고개 마루턱의 창의문 외에 수구문의 외로운「아치」형 돌각문 밖에 없다.
그러나 수구문의 설치와 연대에 관해서는 약간 이설이 있다.
세조2년(1456년) 서울 동남방, 곧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남소문을 내고 광희문이라 하다가 예종 원년(1469년) 당시 남소문 밖에 도적 떼가 들끓어 그 문을 막고 지금의 광희동 2가에 새로 수구문을 남소 문의 현판인 「광희문」을 떼어다 달았다고 한다.
남소문의 위치는 과천과 광주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이지만 「남소문」이란 이름이 태종 실록이나 세종실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예종 실록에 비로소 나타나는 것을 보면 당시의 수구문을 남소문이라고도 불렀는지 모른다.
수구문은 옛날 성내의 백성이 죽으면 시체를 이 문으로 내다가 신당동, 왕십리 금호동 쪽으로 갖다가 매장했으므로 속칭 시구문이라고도 불렸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이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청병이 홍제원까지 진격했건만 조정은 화해와 척화 양론이 엇갈리고 있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자 왕은 사신을 적진에 보내 우선 청병의 진격을 멈추게 한 후 수구문을 빠져나갔다. 이 때 백성들 사이에는 『임금이 수구문을 나갔으니 다시 살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수구문은 시구 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인조는 항복하는 수모를 겪었다
오랜 역사 속에 서민들의 생활을 몸으로 느껴왔던 이 문은 도시 발달에서 밀려 초라한 모습으로 변모되었다. 그래도 신당동에서 광희동을 왕래하는 행인들과 수구문 시장을 드나드는 시민들은 매일 「아치」형 문을 아직도 통과하고 있다. 이 문이 수구문이란 별칭이 붙은 것은 이 문 옆에 도성 안의 내수를 내보내기 위한 수구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성 축조 당시 설치했다는 수구는 찾을 길이 없다. 66년 신당동∼퇴계로 도로공사 때 서울시는 이문을 헐어 없애려고 했었으나 각계 시민들의 반대로 보류되어있다. 이 때문에 수구문은 길 가운데 돌출, 언젠가는 이전 되어야할 운명에 처해있다. 문루하나 없는 성 뒤에는 오랜 풍상에 시달려 풀 포기만이 무성하여 이런 상태로는 10년을 보존키 어려울 것이라고 수구문을 아끼는 시민들은 말하고 있다.<이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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