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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서방북귀의 「찬스」…네팔·버마(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친 중공 정책을 기본적인 외교노선으로 삼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후진국 「버마」 와「네팔」의 민의를 외면한 독재체제는 계속되고 있으나 그 일각에서는 민주주의적 선거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일본의 유력한 한 언론인은 이들 두 나라가 앞으로 중공 일변도 정책을 지양하고 자유세계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인지 그 가능성을 현지답사를 통해 예리하게 분석했다. <편집자주>
작년 10월 필자는 「아프리카」를 여행했다. 그 무렵 신문지상에는 「버마」의 전 수상 「우·누」가 미국을 여행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우·누」는 미국을 여행하면서 『「버마」의 「네·원」 현정권은 민주주의에 입각한 선거를 실시하자는 나의 재삼, 재사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때문에 국외로부터 해방군을 조직해서 공수해 들어가는 도리밖에없다. 나는 그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에 왔다. 「버마」 국민들이 모두 나를 지지한다는 자신을 가지고 있다』고 연설했다.

<쇄국적인 「버마」 외교>
확실히 「우·누」 가 말한 것처럼 「버마」의 현정권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래 한번도 국민에 신임을 물어보지 않고 내정은 관료통제를 계속하고 있다. 외교는 중공의 기분을 상하지 않는 데에만 신경을 쓰는 나머지 자유제국과의 접촉을 피하고 거의 쇄국에 가까운 상황에 처해있다. 그리하여 「아시아」의 「공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이웃나라들에 비해 건설이 뒤떨어졌다.
때문에 「우·누」 가 「버마」의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원래 「우·누」란 사람은 온화한 불교신자로서 혁명을 좋아하는 인물은 아니다. 이런「우·누」가 그처럼 과격한 발언을 하는데는 놀랐다.
작년 11월. 신문에는 또 「우·누」가 「타일랜드」에 망명을 허가 받았다는 간단한 보도가 났다. 필자는 「아프리카」로부터의 귀로에 그를 「방콕」에서 한번 만나 보려고 별렀다. 필자는 「우·누」와는 16년래의 지기였다.
이 사람 말고 또 「우·누」만큼 흥미 있는 인물로 「네팔」의 「비솨스·코이랄라」씨가 있다. 「우·누」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도 8년간이나 구금되었다가 작년 말에야 석방되었다. 필자는 「아프리카」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이 두 사람을 꼭 만나기로 했다.

<자유를 동경하는 「네팔」>
「버마」의 사정은 그래도 바깥 세상에 조금은 알려져 있지만 「네팔」의 사정은 거의 알려져 있지가 않다. 각국의 등산대가 「에베레스」]에 등반하려면 반드시 이 나라를 거쳐야 된다. 등산대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진 것은 등산할 때 짐을 나르는 인부들이 대단히 소박하고 문명사회로부터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가 고작이다.
지난 2월말 「네」] 황태자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결혼식에 코끼리가 등장, 신랑이 되는 황태자가 코끼리 등에 타고 신부가 되는 아가씨를 맞이하러 간다는 꿈나라의 옛이야기와 같은 보도가 전해져도 세상사람들은 이를 미소로 받아들일 뿐 「네팔」과 같은 나라에는 민주주의의 사상 같은 것은 전혀 싹트고 있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국민이 만족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히말라야」의 깊숙한 곳에 있는 이 나라에서도 주민은 같은 인간이다.
「유럽」에서 문예부흥이 있은 바와 같이, 일본에서도 명치유신이 일어난 바와 같이 주민의 자유에의 동경은 역시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네팔」의 근세사는 국민의 민주주의 추구로 일관된 다채로운 것이다. 1950년까지 「네팔」의 정정은 마치 일본의 덕천시대와 같은 것이었다.
역사를 지닌 왕조는 존재해 있었다. 이 왕조는 3백년쯤 전 「네팔」 전토를 통일했다. 그러나 세습 군주제가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국왕은 대를 거처 감에 따라 태만해졌으며 정치의 실권은 신하의 손에 넘어갔다.
국왕의 그 존재는 지속되었으나 전혀 실권을 잃고 정치는 오로지 그 신하였던 「라나」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됐다.

<해외 유학생들 군정 항거>
「라나」가 대대로 「장군」(덕천막부)으로서 독재정치를 행하였던 것이나 그것이 기묘한 세습 제도였다.
장군이 된 자는 현직에 있는 동안 끊임없이 국민이게 가렴주구하여 착취한 돈을 사재로 삼는다.
이를 국내에 저축해서는 위험하다는 생각에 국외에 예금한다. 이렇게 돼서 「네팔」 국민은 곤궁하고 국토는 황폐해 버렸다. 「네팔」의 양가집 자녀들은 인도의 「파노다」 「베나레스」 「라크노」등 여러도시에 있는 대학에 유학가는 자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마하트마·간디」 지도하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인도 국내에 유학하고있던 「네팔」인 학생들은 이에 자극 받아 동조하다가 투옥되는 사례도 있었다. 인도에 독립이 달성되었을 때 「네팔」의 청년들은 인도의 「내셔널·콩그레스」(국민의회)에 해당하는 「네팔·콩그레스」를 조직하여 조국해방에 진력했다. 처음에는 「네팔」령과 연결되어 있는 인도령을 기지로 해서 여기에 집결하며 「간디」류의 무기 없는 침입을 시도했다. 맨주먹으로 「네팔」의 각 촌락에 들어가 「장군」 정치의 타도를 공공연히 설파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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