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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내세운 새 시도|김용운씨 단편 「에이프릴·풀」|이보영 (문학 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직접 예수를 내세운 소설이 또 한편 발표되었다. 김용운씨의 『에이프릴·풀』 (「현대 문학」3월호) 인데 그 서두는 이렇다. 『성도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가던 순례자 한 사람이 <갈릴리>해변의 어느 작은 동굴 속에서 두루마리로 된 양피지 한 묶음을 발견했다고 「AFP 합동」통신이 이를 전했다.』
그래 세계의 저명한 신학자들이 조사, 연구해본바 또 하나의 복음서-『마태』『마가』『누가』『요한』에 이은 제5복음서임이 판명됐다고, 이 단편은 고문서의 내용을 소개한다.
김씨는 그런 형식을 빌어 우리네 사회의 부정부패, 위선, 경박한 풍조 등을 풍자하고 경고하려는 것이다. 그중 한 구절만 인용해본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뇌물질 하지 말라/가짜를 만들지 말라/사치하지 말며 검소 하라….』
예수를 그 소설의 전면에 내세워 다룬 것은 기독교의 본산인 구미에 많을 것 같지만 사실은 오히려 우리 나라처럼 기독교가 충분히 토착화되지 못한 곳에서 나오기 쉽다.
구미의 작가들은 장구한 기독교 문화와 전통의 압력 때문에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감히 예수의 소설화를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예수의 전기는 예외다). 또 비록 그 위험을 감행한다해도 거의 모든 독자의 머리에 젖어 있을 「바이블」의 절대적이요 원천적인 권위의 「이미지」에 대항해 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 우리 나라의 경우, 기독교가 토착화되지 않았음에도 종종 예수를 다룬 소설이 나오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 우선 기독교적 전통이 얕은데서 수반되는 기독교적 가치 감정의 부족-원죄 사상을 피부로 느낄 수 없으리란 것은 차지하고라도, 가령 「G·K·체스터튼」이 『신의 사랑은 우리 마음을 명예로운 수치심으로 가득하게 한다』고 했을 때 (예수를 다루는 한국 작가들에게도 필요할 듯 싶은) 그 수치심을 굳이 『신의 사랑』과 결부시켜야만 만족하는 그 감정이 우리에게는 생소하다는 것, 그러면서도 수입 된지 가장 오랜 불교의 경우와 달리 「바이블」은 웬만한 가정에는 대개 갖춰져 있을 만큼 보급돼 있고, 그 내용으로 볼 때 특히 복음서의 경우는 인간의 구제를 위한 심리극이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현실과 밀착돼 있으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차원에서 펼쳐져 있어 소설 소재로서의 유혹이 크다.
이건 김동리씨의 『사반의 십자가』가 실증해 주었다. 위에 말한 역설적 사상을 새삼 자기류로 해석, 처리 할 수도 없어 그 복음서의 주요한 내용을 그대로 이식한 결과 이 소설의 예수에게는 신비감은 말할 것도 없고 인물로서의 「리얼리티」마저 희미해진 것이다.
김용운씨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 짤막한 소설의 전면에 굳이 예수를 내세워야 했을까 싶을 만큼 종교적 감동이 따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착상이 대담하다면 매우 대담한 이 소설의 제목은 『에이프릴·풀』이다. 우리의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 복음서를 「패러디」한다는 의도가 이 제목 속에도 넉넉히 비쳐 있지만 한편 이런 교재에 대한 작자의 불안감을 그런 제목으로 「커버」하려는 조심스러운 태도도 엿보이는데 그로 말미암아 독자에 대한 설득력은 그만큼 약해진 것이다.
작가는 그의 특권인 「허구」의 묘리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게 좋다.
교묘한 작가라면 바위를 주먹으로 치느니보다 어루만지고, 더욱더 교묘한 작가는 그 바위의 그늘에 감쪽같이 숨어 버린다. 우리는 후자의 예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름다운 인간』(예수)의 비극적 구현인 『백치』에서 본적이 있다.
앞으로 과학 문명이 급진전하고 사회적 불안이 늘어감에 따라 종교의 필요성이 더 커질 것이 예상되고, 여기에 『한국적인 것』의 의식도 곁들여져 우리 나라에서도「샤머니즘」이나 불교의 소재, 혹은 기독교 소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지 않을까 싶다.

<김용운씨> ▲1940년 서울 태생 ▲56년 연세대 국문과 졸 ▲65년 「현대 문학」추천 완료 (작품 『토정 비결』『계단』) ▲69년 창작집 『벙어리 강』출간 ▲현 보성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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