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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입추가 지났다 날이 서늘해지면 말도 순해지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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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러스트=강일구]

모두 대책 없는 더위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요즘 말[言]들이 너무 거칠어진 것 말이다. 국회에선 한 여성의원의 폭언 여부를 놓고 공방이 벌어졌다. 동료의원에게 ‘너 인간이야’라고 폭언을 했다더니 이번엔 국정원장에게 ‘저게 국정원장이야’라고 막말을 했다나. 사람과 사물을 혼동하는 듯한 화법이 어휘력의 문제인지 자질 문제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국회의원의 막말이야 익숙한 데다 의식 있는 국민들은 국회의원 말은 본받을 바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일단 논외로 치자.

 요즘 정말 걱정되는 건 폭언과 막말의 집단화와 일상화다. 국회의원도 아닌 일반 시민들이 주로 인터넷상에서 특정 개인에 대한 비아냥과 욕설을 넘어 이젠 집단 대 집단의 대립과 타 집단에 대해 무차별 공격을 퍼붓는다. 성재기 남성연대 대표의 주검이 발견된 후엔 남녀 간에 서로 인간끼리의 소통이라기엔 민망한 ‘암컷 대 수컷’의 싸움 같은 양상을 보이더니 이번엔 특정 지역에 대한 비방이 점입가경이다.

 특히 광주·전남 지역에 대한 비방은 무서울 정도다. 발단이 된 사건을 보면, 이 지역 사람들이 욕먹을 일이 아니다. 한 예로 2019 세계수영선수권대회의 광주 유치를 위해 서류 조작을 벌인 사건은 부도덕한 관료에게 속은 광주 시민도 피해자다. 그런가 하면 차영 전 청와대 비서관의 막장 같은 개인사를 놓고도 이 지역이 욕을 먹는다. 여기에 지역 사람들이 무슨 책임이 있나?

 사이버 세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배설적 언어현상이라고만 하기엔 도를 넘었다. ‘윗물’ 탓하기엔 윗물 맑아지길 기약할 길 없으니 큰일이다. 옛사람들이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 혀는 몸을 베는 칼)’라며 말조심을 당부한 건 더러운 말은 세상을 더럽히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말이 더러워지면 인격도 더러워진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동방예의지국 국민들이 이렇게 예의를 잃게 되었을까. 그러던 중 최근 영국 BBC방송에서 보도한 미국 버클리대학 연구팀의 ‘날씨와 폭력’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결과에서 핑곗거리를 찾았다. 기온이 2도씩 오를 때마다 개인 간 범죄는 15%, 집단분쟁은 50% 넘게 는다는 것이다. “그래, 너무 더워져서 그럴 거야.”

 어제가 입추(立秋)였다. 고희림 시인의 시 ‘입추’엔 이런 대목이 있다. ‘요즘 부쩍 는 게 있다면 욕입니다/달라진 게 있다면/귀뚜라미처럼 저음으로 쓸쓸하게 혼자서 여러 번 내뱉는다는 거지요.’ 한여름의 열정과 폭주가 세상을 향한 것이었다면, 입추로부터 시작되는 가을은 자신을 향해 반성하고 반추하는 계절이라는 뜻일 게다. 아침 출근길엔 잠자리가 나는 것을 보았다. 가을은 올 거다. 이와 함께 말이 순해지기를 고대한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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