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독트린」을 계시한|인니 2막 「쿠데타」의 진상|데니스·워너 기(KHS 통신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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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월남 전쟁이 어느 날엔가 가까스로 종식되어 고통스럽던 일들도 모두 잊어버렸을 때, 1965년9월30일의 밤과 그 다음날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은 동남아에 커다란 전기를 초래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사람들의 가슴에 되새겨 질 것이 틀림없다. 그후의 경과는 너무나도 참담한 결과가 되었다고는 하나 그것이야말로 동남아의 역사의 흐름을 전적으로 변화시킨 2일간이었다고 해도 좋다. 이 때문에 「수카르노」대통령은 권력을 상실하고 동남아 전체를 위협했던 북평·「자카르타」추축은 붕괴되고 「인도네시아」공산당은 궤멸되고 말았다.
당시 미국 대사로서「자카르타」에 주재했고 현재는 동「아시아」및 태평양 담당의 국무차관보인 「마셜·그린」이 후일 「닉슨·독트린」으로 발전하여 미국의 새로운「아시아」 정책에 관련되어 있던 『신의 계시』를 받은 것도 그때였다.
「그린」이 그때 경험한 것은 「인도네시아」는 후진 동남아의 일국으로서 언제 공산주의자의 손에 떨어질지 모르는 상태에 있으면서 돌연히 분기하여 미국으로부터 1「센트」의 원조도, 또 단 한 명의 병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문제를 처리한 것이었다.
형세는 압도적으로 비관적이며 모든 것은 공산당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일 「인도네시아」가 독자적으로 그것을 해냈다면 타국에서도 안될 리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린」은 미국의 월남 개입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면 공산주의의 중압은 「인도네시아」에 있어서나 또 다른 동남아 제국에 있어서도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9·30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앞으로 취해야 할 방책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린」은 별로 타국에 대한 원조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원조는 좀더 여러 가지 형태로 행해져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닉슨」이 「자카르타」를 방문했을 때 「그린」은 자기의 생각을 솔직하게 진술했다.
「닉슨」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리하여 대통령 선거가 행해지기 훨씬 전에 오늘날 「닉슨·독트린」이라고 불리는 것의 토대가 이미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9·30사건의 진상은 현재도 오리무중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몇 권의 책이 나와 있다. 세간에서 아주 값이 싸게 팔린 「코넬」대학의 현대 「인도네시아」연구실 서도 진상을 밝힐 의도로 급히 정리한 것을 특정인에게만 배포했으나 결과는 혼란만 초래할 뿐이었다.
그에 의하면 9·30 사건은 군부의 「쿠데타」로서 공산당의 음모가 아닌 것으로 되어 있고 이 견해는 여러 가지 반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국을 비롯해 각국의 학계 일부에서 믿어지고 있다. 「수카르노」가 실패로 끝난「쿠데타」에 어느 정도 관여하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다. 만일 그가 직접 관계하고 있었다면 그만이 재판에 회부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미국의 작가이며 「저널리스트」인 「아널드·블랙맨」은 「수카르노」가 공산주의 공포증에 걸려 있는 장군들을 반역죄의 오명을 씌워, 국외로 추방하려던 전말을 자세히 그의 저서 『「인도네시아」공산당의 붕괴』에서 서술하고 있다. 공산당은 그것을 노린 것이다. 「수카르노」가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중공에서 파견된 의사로부터 들은 「아이디트」공산당수는 회복의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수카르노」가 죽으면 평소부터 공산당을 원수처럼 생각하고 있는 군부가 당을 파멸시킬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65년8월28일 당정치국은 전원 일치로 군 수뇌에 선제 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수카르노」는 시체가 된 장군을 보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만일 「수하르트」현 대통령이 「수카르노」를 재판에 걸려고 생각하면 증거는 얼마든지 있지만 「수하르트」는 현명하게도 「수카르노」를 애써 순교자로 만드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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