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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김찬삼 여행기 <필리핀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작렬하는 열대의 태양 아래서 보름 동안이나 쉴 사이 없이 쏘다녔더니 나의 얼굴은 온통「필리핀」사람처럼 갈색으로 그을었다. 여러 격전지에선 20세기의 전쟁 서사시를 읊조리고, 열대림이 우거진 자연 속에선 태고 적의 노래와도 같은 이름 모를 곤충이며 새들의 연가를 들으면서 이 나라의 풍물을 만끽했다. 아직까지는「마닐라」북쪽「루손」지방을 보았기에 이번엔 이 나라의 최남단에 있는「민다나오」도까지 남북 종단을 하기 위하여 도로 사정이 가장 잘 그려졌다는 최신 지도를 구하여 이른바 작전계획을 꾸몄다.
떠나는 전날 밤, 여기서 사귀었던 몇몇 남녀들의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육상으로 종단 여행을 하겠다고 했더니 모두들 펄쩍 뒤며『우리「필리핀」사람들도 꺼려서 잘 안가는 길을 외국인인 당신이 어떻게 가려 하지요? 미개한 고장이 많아서 혹 박해라도 받을지 모르니 그러지 말고 선박이나 여객기를 이용하시오』라고 간곡히 말렸다.
더구나 이국인끼리의 우정이란 초 시간적·초 공간적으로 맺어지는지 갓 사귄 사이건만 처음부터 내게 갖은 친절을 베풀어 준 여성 한 분은 위험하니 부디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렇다고 나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어려운「아프리카」도 종횡으로 달렸는데, 자그만「필리핀」쯤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날 밤 이들은 조촐한 환송회를 열어 모두를 고맙게도 나를 위하여 기도까지 해주었다. 그 이튿날인 1월 26일 새벽 6시에 떠나는 급행열차를 타기 위하여「마닐라」역엘 나갔다. 이 나라의 중앙 역인 데도 국제적인 체면을 생각지 않는지 역 안은 헐고 더러웠으며 전등마저 희미하여 감방처럼 어둠침침했다. 그리고 청소라곤 하지 않은 듯 발착 시간표는 먼지 투성이었다. 이렇게 불결하니 높다란 천장엔 거미줄이 많이 쳐 있을 지도 모른다.
개찰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미스터·킴!』하는 낯익은 소리가 들리기에 돌아보니 엊저녁의 모임에서 가지 말라고 말리던 그 여성이 아닌가. 늦을세라 뛰어왔다고 하며 숨이 넘어갈 듯 할딱거리면서 무엇인가를 내밀었다. 점심때 먹으라고 자기 집에서 손수 만든 음식이라고 했다. 그녀의 우정 아닌 모성애(?)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그녀는 이「마닐라」에서 사귄 여러 사람 가운데서도 유독 우리 나라에 큰 관심을 가진「인텔리」여성인데 이런 후한 대접을 받고 보니 무어라고 감사해야 좋을지 몰랐다.
발차 시간이 되어 오래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구내에 들어갈 때 그녀는 십자를 그어주었다. 눈물겹도록 고마왔다.『여성적인 것만이 오직 우리를 구원한다』는「괴테」말처럼 이국인인 나에게 뜨거운 사랑(모성애가 아니라 박애)을 베풀어주는 그 여성이야말로 나에게는 수호의 여신이었다.
나는 이상한 용기가 솟구침을 느꼈다. 이렇듯 갸륵 한 여성을 만났다는 크나큰 기쁨을 안고 부랴부랴「플랫폼」으로 달려가 차에 올랐다.
미국의 「디젤」기관에다 일본제 차량을 단 열차인데 여객이란 거의 초라한 모습들이며 찻간은「에어·컨디션」이 되어 있다고 쓰이어 있으나 언제부터 고장이 났는지 바람을 맞기 위하여 창문을 열어 두었다. 열차 청소는 좀체로 하지 않는지, 과장이 아니라 이 창에는 먼지가 퇴적층을 이루고 있었다. 차는 정각이 훨씬 지나서야 떠나는데 기적은 들리지도 않았다. 만일 출발신호가 으레 있겠거니 하고 짐만을 차에 질었더라면 큰 봉변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이 차는「마닐라」역에서 서너 정거장까지는 순전히 거리 한가운데를 지나는데, 차창으로 손을 내밀 수 없을 정도로 철로 가에 즐비 한 집들의 처마가 철로 연변 가까이 까지 나와 있었다.
도중에서 차표 검사가 있었다. 우리나라 것보다 길이가 두 곱이나 되는 기차표를 차장이 절반 잘라 가지는데, 어떤 여객들은 차장에게 웃음을 지으며 빌붙는 것을 보니 아마도 공짜로 태워 달라는 모양이다. 이 나라와 철도 행정도 인도처럼 문란해 보였다.
차에 탔을 때부터 아랫도리가 자꾸 따끔거리기에 흑 벼룩이라도 있는가 하고 살펴보니 다름 아닌 모기떼들이었다. 의자 밑에서 살며 손님의 피를 빠는 이른바「열차 전속 모기」 랄까! 달려드는 모기를 때려잡다 보니 손바닥에 피가 많이 묻었다. 이 모기를 견디기는 그리 어렵지는 않지만 화장실은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수세식이라곤 하지만 그것은 허울 좋은 이름 일뿐, 오랫동안 변기를 닦지 않아서 악취가 코를 찌르기 때문이었다. 눈까지 쓰라려 뜰 수 없을 정도였다. 남자들은 몰라도 여성들은 쭈그리고 앉아야 하니 크나큰 고통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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