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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열 "지쳤다" … 청와대 온건론자의 퇴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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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청와대 수석 비서관이 네 명이나 교체된 마당에 물러나는 게 도리가 아니겠느냐.”

 이정현 홍보수석이 청와대 개편 공식 브리핑을 하기 직전인 5일 오전 9시50분, 허태열 전 비서실장은 자신의 사무실을 찾은 몇몇 측근들에게 이 같은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일하는 동안 최선을 다했고, 한 점 소홀함 없이 대통령을 보좌하려 했다. 때론 직언도 했다. 그렇지만 박 대통령과 불협화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란 취지의 말도 했다고 한다. 또 그는 며칠 전부터 교체를 예감한 듯 “심신이 지쳤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실제 허 전 실장은 몸무게가 최근 7㎏ 정도 빠지고 잠도 설치는 등 컨디션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즐겨하는 폭탄주도 최근엔 거의 입에 대지 않을 정도였다.

 원조 박근혜계 인사로 2012년 새누리당 총선 공천에서 탈락한 후 2선으로 물러났다 박근혜정부 초대 비서실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던 그가 비서실장 임명 169일 만에 전격적으로 교체됐다.

 허 전 실장의 교체는 박 대통령이 1박2일간의 짧은 휴가를 보냈던 ‘저도 구상’에서 나왔다. 박 대통령이 수석 비서관들을 대거 교체해 하반기 국정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비서실장의 동시 교체 쪽으로 기울었다는 분석이 많다.

 일부에선 인사 문제를 놓고 박 대통령과 허 전 실장 간에 불편한 기류가 있었다는 관측도 나온다. 특히 공공기관장 인사가 지나치게 관료 출신들로 채워졌다는 지적과 함께 인사가 일시 중단되는 굴곡을 겪기도 했다. 허 전 실장은 인사위원회 위원장이다. 또 청와대 정무수석 인선도 허 전 실장이 추천한 인사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서 공백이 두 달 이상 장기화하기도 했다. 일각에선 허 전 실장이 지난 5월의 ‘윤창중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소극적 태도를 보여 사태를 꼬이게 한 것도 교체의 원인이 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박 대통령과 허 전 실장은 최근 국가정보원 사태를 놓고서도 다소 이견이 있었다고 한다. 내무 관료 출신인 허 전 실장은 청와대 내에서 온건론자로 분류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은 국정원 사태에 대해 야당에 단호한 모습을 보인 경우가 많았던 데 반해, 허 전 실장은 민주당 홍익표 전 원내대변인의 ‘귀태’(鬼胎·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 발언 파문이나 국가정보원 국정조사 등 여야 갈등 상황에서 여권이 양보해야 한다는 등의 온건론을 편 적이 많았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과 허 전 실장 간에 온도 차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내무 관료로 잔뼈가 굵은 허 전 실장이 풍부한 공직 경험과 정무 감각(3선 의원)을 바탕으로 불안정한 출발을 했던 ‘1기 청와대’를 안착시키는 데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는 호평도 적지 않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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