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남북회담 시즌2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이영종
정치국제부문 차장

국내에서 인기를 끈 ‘섹스 앤 더 시티’나 CSI·프렌즈·X파일 등 미드(미국 드라마)는 대부분 시즌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24회 안팎의 분량을 주1회 편성해 6개월 정도 먼저 방영한 뒤 시즌2를 준비하는 방식이다. 시즌과 시즌 사이에는 충분한 시간을 둔다. 제작진이 휴식을 통해 창의성 있는 아이디어를 내고 밀도 있는 작품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일만큼이나 여가와 휴가를 중시하는 서구 합리주의 문화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여름 바캉스가 절정에 달한 요 며칠 통일부와 대북 부처는 업무 긴장감이 팽팽하다. 북한에 던져놓은 개성공단 정상화 후속회담 제의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회담 채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에선 개성공단 문을 닫아야 할 경우에 대비한 검토작업도 이뤄져야 한다. “이번 회담제안이 마지막이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북한에 최후통첩성 으름장을 놓았으니, 북한이 호응하지 않을 경우 후속 카드를 빼내 들어야 한다는 측면에서다.

 개성공단 회담이 6차례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파국을 맞은 건 지난달 25일. 북한은 결렬위기에 부닥치자 단장이 직접 남한 기자들이 있는 프레스센터에 난입해 자신들의 합의문 초안을 까버렸다. 비공개 회담을 언론에 일방적으로 공개한다는 건 회담 판을 일단 접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양측이 냉각기를 갖고 돌파구 마련을 위한 전략을 다시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게 필요했다.

 하지만 사흘 만에 정부가 회담 속개를 촉구하는 대북 성명을 내고 “답을 주지 않으면 중대결단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국면은 쉴 틈 없이 돌아가게 됐고 당국자들의 휴가 스케줄은 꼬였다. 물론 회담의 모멘텀을 유지해 하루빨리 공단을 재가동해야 한다는 정부의 생각을 모르는 바 아니다. 투자설비를 고스란히 날리게 된 123개 기업의 답답함도 고려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숨돌릴 틈도 필요했다. 혹여 정부가 ‘대화는 선이고 단절은 악’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회담을 위한 회담에 집착한 건 아닌지 되짚어볼 일이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긴급 기자회견에서 성명을 낸 건 일요일인 지난달 28일이었다. 북한이 성대한 기념행사를 예고했던 7·27 ‘전승 60주’(휴전협정 체결 기념일) 이튿날이다. 행사 준비의 긴장감에서 벗어나 달콤한 일요일을 즐기고 있던 북한 대남부서 당국자들은 혼쭐이 났을 것 같다. 북한이 며칠째 가타부타 답을 주지 않는 걸 두고 “휴일 습격에 대한 불쾌감 때문일 것”이란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북한의 침묵이 길어지자 국장급 당국자들이 속속 휴가에 들어갔고, 류 장관도 이번 주말부터 여름휴가를 떠난다고 한다. 부디 훌훌 떨치고 다녀오길 바란다. 최근 그를 접한 지인들은 업무 스트레스 때문인지 류 장관이 많이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고 입을 모은다. 취임 5개월째인 장관이 이래선 안 된다. 늦둥이 딸을 비롯한 가족과 충전의 시간을 갖고 창의적 대북접근을 구상했으면 한다. 남북회담에도 시즌2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영종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