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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면 그냥 좋아요, 미소천사 전민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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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다섯 살 때 뇌염을 앓은 후 손이 불편해졌다. 그러나 양발은 튼튼하다. 공기를 가르며 달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전민재는 세계 장애인 육상의 여자 챔피언이다. 그의 나이는 서른여섯. 그러나 표정은 10대처럼 해맑다. 전민재가 지난달 열린 장애인 육상 세계선수권 200m에서 딴 금메달을 보여주며 활짝 웃고 있다. [양광삼 기자]
지난달 24일 200m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한 바로 그 순간. [중앙포토·게티이미지]

“달리는 게 좋아요?”라고 물으니 잘 가누지 못하는 손을 흔들며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낯선 사람을 만나 내내 굳어 있던 얼굴에도 그때부터 웃음꽃이 활짝 폈다. 장애인 여자 육상의 1인자가 된 전민재(36)는 달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세계 최고가 됐다. 전민재는 지난달 24일(한국시간) 프랑스 리옹 론 스타디움에서 열린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 세계육상선수권대회 T36(뇌성마비) 여자 200m 결승에서 30초96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민재는 IPC 주관 대회에서 첫 우승을 했고, 한국 여자 선수로는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 100m에서는 은메달을 추가했다. 육상을 시작한 지 딱 10년 만에 이룬 쾌거다. 리옹에서 막 귀국한 지난달 30일 서울 화곡동에서 전민재와 어머니 한재영(62)씨를 만났다.

지난해 런던 장애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후 스승에게 보낸 감사 편지. 손보다 더 자유로운 발로 썼다. [중앙포토·게티이미지]

 한씨는 “처음에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민재가 세계 정상에 오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딸을 애잔하게 바라봤다. 6녀1남 중 셋째인 전민재는 다섯 살 때 뇌염에 걸려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다. 누구보다 똑똑해 한글도 척척 읽던 민재는 손이 뒤틀리고 말도 못하게 됐다. 정신은 멀쩡한데 온전한 건 다리뿐이고 의사소통도 못하게 돼 미칠 지경이었다. 한씨는 “뇌염 예방주사도 맞혔는데 걸렸다”고 했다. 전민재는 집안에만 틀어박혀 유년기를 암담하게 보냈다. 세상과 맞서기로 결심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건 열아홉 살 때였다. 발로 글씨 쓰기를 습득했던 전민재는 학교에서 펜 대신 붓을 들었다. 발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꿈꿨다.

 하지만 10년 전, 스물여섯 살에 운명처럼 달리기를 만났다. 전주 동암재활학교 중학 과정 2학년 때 김행수 체육교사를 만난 게 그 시작이었다. 김 교사는 전민재가 달리는 것을 보고 재능을 알아봤고, 전민재는 그해 장애인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해 금메달과 은메달을 땄다. 전민재는 발에서 붓을 놨다. 그 발로 뛰는 데 집중했다. 뒤늦게 육상을 시작한 탓에 몇 배로 노력해야 했다. 전민재는 일주일 계획표를 스스로 짰다. 웨이트 트레이닝, 조깅, 식이요법 등 전민재만의 훈련 시스템을 만들었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딱딱한 운동장을 뛰다 발톱이 다 빠져 푹신푹신한 땅을 찾아다녔다. 마침 고추농사를 하는 부모님을 따라 고추밭에 나가 고랑을 전력질주하면서 훈련했다.

 전민재에게는 아무리 훈련을 해도 극복 못 하는 게 있었다. 남들보다 유난히 작은 키(1m46㎝)다. 전민재는 키 이야기가 나오자 울상을 지었다. 한씨도 “나도 작다. 거기다 제대로 먹이질 못해서 민재 키가 크지 못했다”고 한숨 쉬었다. 한씨도 전민재와 비슷한 키다. 100m와 200m가 주력 종목인 전민재는 결승선을 간발의 차이로 뒤처져서 통과할 때 ‘다리가 길었으면 키가 큰 외국인 선수들을 제치고 1위를 할 수 있을 텐데…’라는 미련이 생겼다. 그러나 전민재는 한탄만 하는 그저 그런 선수가 아니었다. 그는 키가 큰 다른 선수를 제치기 위한 비책으로 ‘스타트’를 연습했다. 좀 더 빠르게 앞으로 나가되, 부정출발로 실격되지는 않는 방법을 체득했다.

 전민재는 장애가 있지만 일반인보다 더 부지런하고 똑 부러진다. 한씨는 “우리 부부가 전북 진안에서 농사일 하느라 바쁘다 보니 민재가 집안일을 다한다. 이번에 민재가 대회 나가 있는 동안 내가 힘들었다”며 웃었다. 전민재는 손을 못 쓰는데도 발을 이용해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게 깨끗하게 청소한다. 라면도 끓이고 밥도 짓는다.

 천생 여자이기도 하다.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 식이요법을 하면서도 달콤한 커피는 꼭 마셔야 한다. 기자와 만난 날도 시럽까지 듬뿍 넣은 바닐라 라테를 다 마셨다. 인터넷 쇼핑도 즐겨 하는 데 주로 사는 건 치마다. 훈련을 안 할 때는 예쁜 치마를 입고 화장도 곱게 한다. 또 노트북 바탕화면, 휴대전화 사진첩에도 배우 원빈 사진이 가득할 정도로 좋아한다. 전민재는 원빈을 꼭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수줍게 드러냈다.

 육상 선수로서의 소망을 말할 때는 당당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40’이라는 숫자를 탁자에 적었다. 한씨는 “민재의 목표는 마흔 살까지는 뛰는 것이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은퇴하고 싶다고 한다”고 전했다.

 전민재는 스마트폰에 직접 적어온 글귀를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장애인 육상 선수들이 마음 편히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실업팀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소영 기자

전민재 프로필

▶ 생년월일 : 1977년 7월 12일

▶ 종목 : 장애인 여자 육상 100m·200m T36 등급(뇌성마비)

▶ 경력 : 2008 베이징 패럴림픽, 2010 광저우 아시안 패러게임, 2012 런던 패럴림픽 출전

▶ 수상 : 2010 광저우 아시안 패러게임 100m·200m 은메달, 2012 런던 패럴림픽 100m·200m 은메달, 2013 국제패럴림픽위원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 100m 은메달·200m 금메달, 2012 전국장애인체육대회 최우수선수, 제5회 소강체육대상 특별선수상

▶ 취미 : 영화 관람, 인터넷 쇼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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