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윤의사의 의거|곽상훈<전 민의원의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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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2월19일은 매헌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지 37주를 맞는 기일이다. 그가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집을 떠난 것은 1930년의 일. 의사는 벌써 이때 마음속의 폭탄은 이미 준비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 마음의 폭탄을 보물로 바꾸기까지 그는 한층 마음의 도야와 치밀한 계획을 다듬었을 뿐이다.
그가 이미 마음의 폭탄을 가지고 집을 떠났다는 유일한 증거로는 상해에 도착하면서 자당께 드린 편지에서 자기의 심정을 술회한 것이 있다. 의사가 상해에 도착한 것은 1931년의 일이다.
당시 극동정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왜적은 소위 만보산사건을 트집잡아 만주에 있는 한국민의 안전보장을 구실로 이해9월에 관등군과 조선군을 만주로 출병케 했다. 다시 윤조구사건을 조작해 가지고 장학량의 동삼생 정권을 전복시켰다.
이듬해인 l932년에는 이봉창 의사의 왜황 폭살미수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왜는 이것을 구실로 상해사변마저 일으켰던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한·중 양국간에는 민족적 대립감정이 극도로 날카로와 졌다. 여기에 한층 더 나아가서 왜군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 중국정부는 꺾이고. 마침내 중·일간의 휴전회담까지도 진행되고 보니 이것이 조인되는 날에는 우리가 가장 튼튼한 거점으로 삼던 독립운동의 기지는 완전히 무너지게 되고 조국광복을 위한 몸부림이나마 쳐볼 수가 있었겠는가.
여기에서 윤의사는 마음의 폭탄을 선물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것을 왜항의 생일축하와 저들의 소위 전승 축하식장인 홍구공원에 던져 백천이하 대륙침략의 원흉들을 작사, 내지 중상시켰던 것이다. 당시 대판조일신문은 4월30일자 「제네바」의 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상해사건은「제네바」하늘을 청천벽력으로 흔들어 일반을 놀라게 했다. 중·일 양국은 정전협정에 조인하려던 찰나인 만큼 상해로부터의 이 비통한 보도는 우리들의 놀람을 더욱 심각하게 했다.』
정말로 청천벽력을 일으킨 의사의 일탄은 금시에 커다란 파문을 온 세계에 던졌다. 중국정부는 그제야 우리 임시정부를 인정하여 우리 독립운동에 대한 모든 원조를 하게 되었다. 장총통은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즉시독립을 주장했고 이로써 일제의 「아시아」침략의 야망을 전 세계에 폭로하여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주국가에 일대 경종을 울렸다. 이렇게 볼때 약령 25세의 윤의사의 이 의거는 그를 『민족의 얼, 세기의 영웅』이라고 부르기에 주저치 않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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