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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만에 곡 하나 후딱 열음 누나 같은 사람도 있지만 저는 … 딱 연습한 만큼이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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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호 17면

올해 피아니스트 김다솔(24)은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국내 클래식 팬들의 뇌리에 확실하게 새길 듯하다. 한국 공연장 최초로 금호아트홀이 운영하는 상주음악가(Artist in Residence) 1호로 선발된 그는 올해 예정된 여섯 회의 음악회 중 네 번의 무대를 마쳤다. 1월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와 스크리아빈·라흐마니노프 등을 1시간30분 동안 휴식 없이 내리치는 ‘쇠심줄 배짱’으로 화제가 됐다. 5월엔 신진 피아니스트들이 꺼리는 고전 레퍼토리의 대명사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도전, 박수를 받았다. 이달 들어선 첼리스트 안드레아스 브란텔리트, 바이올리니스트 에릭 슈만, 첼리스트 데이비드 피아 등과 두 차례의 협연 무대에서 실내악의 자유분방한 에너지를 선보였다.

금호아트홀 첫 상주음악가로 활동 중인 피아니스트 김다솔

무대에서 엿본 그의 모습은 때론 한없이 여유만만하고 때론 사자후를 떠올리게 하리만치 격정적이다. ‘연주’가 아니라 ‘연기’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반면 무대 밖에선 미성과 앳된 미소가 남아 있는 소년 같은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일찍부터 자신의 일을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해온 사람 특유의 성숙함이 잔향처럼 감돈다. ‘금호 영재’ 출신인 선배 손열음(27)과 김태형(28) 등을 제치고 국내 대표 클래식 공연장의 상주음악가로 발탁된 그를 11일 연주회를 앞두고 만났다.

김다솔이 피아노에 입문한 과정을 듣다 보면 일본 만화 『피아노의 숲』이 떠오른다. 세계적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의 연주가 포함된 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이 만화엔 두 명의 소년이 나온다. 유명 피아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던 슈헤이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한 번도 피아노를 쳐보지 못했던 카이다. 카이가 사는 시골로 전학 온 슈헤이는 카이의 손에 이끌려 숲에 있는 낡은 피아노를 발견하게 된다. 카이는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지만 너무도 쉽고 즐겁게 연주한다.

교육이 만든 재능과 타고난 재능. 두 명의 소년 중 고르라면 김다솔은 카이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에겐 여느 음악 영재처럼 그림자마냥 쫓아다니던 극성 부모가 없었다. 혼자 외아들을 키우며 직장 생활 하느라 바빴던 어머니는 노는 시간 줄여 피아노에 전념하라 호령하는 ‘타이거 마더’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남자애가 무슨 피아노냐”며 마뜩잖아 하는 편이었다. 당시 중산층 가정에 ‘인테리어용’으로 한 대씩 있던 피아노도 집엔 없었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당연히 피아노 교습도 받지 않았다. 이모 집, 혹은 동네 교회에 가서 건반을 만져보는 게 전부였다.

예중·예고를 나오지 않아 ‘토종 영재’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손열음(27)도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하지만 김다솔이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운 건 초등학교 5학년이 돼서였다. 전교생 중 악기를 하는 아이는 남녀 통틀어 그가 유일했다. “별명이 ‘야, 피아노!’였어요. 그땐 저만 악기를 한다는 게 좀 불편했어요. 내가 남과 달라 자랑스럽다기보다는 튀는 게 싫었던 시절이었죠.”

일단 눈과 귀가 트이니 영재성은 무섭게 발현되기 시작했다. 소년은 마치 피아노를 치기 위해 태어난 양 앞으로만 내달렸다. 당시 별명이 ‘부산의 천재 소년’. 부산시 예술영재교육원 음악영재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했고 부산예고 1학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예술영재 선발고사에 합격했다. 당시 지역 언론에선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교회 피아노로 연습한 천재 소년이 예종에 합격했다”며 보도하기도 했다. 일본 나고야 콩쿠르 우승,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 2위, 독일 라이프치히 국립음대와 하노버 국립음대 진학 등이 모두 스무 살 이전에 이뤄졌다. 최근엔 프랑스 에피날 콩쿠르 우승(2011), 스위스 게자 안다 콩쿠르 2위(2012)까지 화려한 입상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정식 피아노 교습은 초등학교 5학년부터 … 별명이 ‘천재 소년’
스타트는 다소 늦었지만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른 발전 속도에 대해 그는 ‘타고난 재능’보다는 ‘타고난 스승 운’을 먼저 얘기했다. 부산 시절 영재성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김인일 부산대 음대 교수나 임종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예고 1학년 때 떠난 독일 유학에서 만난 세 명의 스승들도 그가 목말라 했던 조언을 시기적절하게 해줬다. 첫째가 라이프치히 국립 음대의 게랄드 파우트 교수다.

“입학한 다음 1년간은 아예 콩쿠르에도 못 나가게 했어요. ‘네가 지금 콩쿠르 나가면 우승할 것 같으냐’면서(웃음). 독일에서 활동할 거면 독일어부터 완벽하게 배우라고 하더군요. 제 딴엔 수업도 잘 듣고 친구도 많이 사귀었는데 선생님이 보기엔 어학 실력이 턱없이 부족했었나 봐요. 유학 가기 전까지 콩쿠르 입상을 위해 틀에 박힌 듯 정형화된 음악을 하는 데 대한 답답함이 늘 있었는데, 파우트 교수를 만나 많이 해소됐어요. 처음 만났을 때 ‘네가 하고 싶은 음악을 다 못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는데 순간 막혔던 가슴이 뚫리는 것 같았죠.”

3년 후 옮긴 하노버 국립 음대에선 칼 하인츠 캠멀링 교수를 만났다. “‘틀려도 좋고 듣기 싫은 소리가 나도 좋으니 네 속에 있는 걸 자유롭게 모두 풀어놓으라’고 하던 게 기억나요. 지난해 돌아가실 때까지 후배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최대한 나눠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했던 분이죠.”

현재 그의 지도교수는 손열음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아리에 바르디다. 독일 국립대는 학비가 거의 들지 않기 때문에 부모의 뒷바라지 없이도 콩쿠르 상금 등으로도 유학 생활이 가능하다.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 선정과 더불어 그가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이유다.

13년간 피아노만 줄창 친 그에게 슬럼프가 찾아온 적은 없었을까. “한때는 잘한다, 잘한다 소리를 들으니 ‘조금만 연습해도 난 되는 건가’ 싶기도 했어요. ‘난 죽어도 안 되는구나’ 절망했던 적도 많고요. 2010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나가서 6위 했을 때. 그때가 슬럼프였어요. 지금은…딱 연습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것 같아요. 물론 열음 누나(손열음)처럼 이틀 만에 곡 하나 후딱 해치우고 무대에 올라가서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전엔 그게 정말 부러웠는데 이젠 인정할 건 인정하게 됐어요. 그건 열음 누나 재능이고 내 건 아닌 거죠. 연습 조금만 해도 되는 사람은 조금만 하면 되는 거고 나처럼 많이 해야 하는 사람은 많이 하면 되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말 마음껏 할수 있는 게 음악의 매력”
손열음은 지난해 말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비평은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금 다른 의미에서 김다솔 역시 연주회 리뷰는 읽지 않는다. “리뷰를 읽게 되면 아무래도 연주에 영향을 받아요. 안 받는다고 말해도 마음속엔 남아요. 칭찬도 싫고 욕도 싫어요. 별생각 없이 연주했는데 ‘최면적인 연주였다’ 이런 평이 나오면 어리둥절하지 않나요?(웃음) 누가 신문을 가져다주면 그냥 접어서 옆으로 치워요. 3년쯤 뒤에 읽으면 재미있을 것 같긴 해요. 3년 전 연주면 내가 들어도 ‘아, 그땐 못 쳤네’ 할 테니까. 유튜브에 올라오는 연주 동영상은 이젠 좀 보려고 해요. 내가 생각했던 거랑 실제 연주가 너무 달라 보기가 싫었는데 생각이 점점 달라져요. 내가 생각한 걸 제대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다른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오히려 음악가가 평생 맞붙어야 할 상대는 타인의 평가보다는 스스로의 재능에 대한 의심인지도 모른다. “매일 매일 건반을 누르는 순간마다 의심해요. 음악에서 한계란 건 양면성이 있어요. 당연히 한계란 건 있지만 동시에 음악엔 정답이 없으니 한계가 없다고도 볼 수 있는 거죠. 아침엔 정신 없이 헤매다가 저녁엔 뭔가 딱 떠오를 수도 있고요.” 매순간 재능을 확인하고 슬럼프를 넘나드는 연주 생활에서도 “평생 피아노를 치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드는 동력은 연주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이다.

“음악은 언어나 미술처럼 형체가 있는 게 아니어서 좋아요. 사랑하는 감정, 가슴이 벅차올라 터져버릴 것 같은 감정을 말로는 100% 전달할 수 없잖아요. 음악은 그게 가능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소리쳐 마음껏 할 수 있는 게 음악의 매력 같아요. 다 집어던지고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죠. 연주는 항상 즐거워요. 어떨 땐 좀 더 생생하게 표현하고 싶어서 안 좋았던 예전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낼 때도 있어요. 연주도 일종의 연기니까요.”

외동으로 자라 어린 나이에 홀로 유학 생활을 한 그에게 피아노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애인이자 가족일 터다. 하지만 그는 피아노만 알고 사는 삶을 경계하는 듯했다. “피아노가 삶의 전부인 사람들을 보면 답답해요. 그래서 영화나 책, 드라마 등을 챙겨보려고 해요. 음악도 클래식만 듣지 않고 팝음악을 많이 들으려고 하고요. 이번에 서울 오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 ‘안나 카레니나’를 봤는데 도착하자마자 원작 소설을 사서 지금 푹 빠져 있어요.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도 제 친구들은 저보고 ‘꽉 막혔다’고 하는 걸요.”

다시, 『피아노의 숲』얘기다. 악보를 못 읽지만 선율을 들으면 바로 건반으로 옮길 수 있는 천재 소년 카이는 피아노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슈헤이에게 “노력하기보단 즐겨야 돼”라고 말한다. 이걸 김다솔 식으로 말하면 “노력하면서 즐길 줄도 알아야 돼”쯤 되지 않을까. 김다솔의 금호아트홀 음악회는 ‘현대음악 리사이틀’(10월 10일), ‘윈터 재즈 나잇’(12월 12일)으로 이어진다. 노력하는 걸 즐거워하는 천재 소년, 아니 이제는 청년이 된 김다솔의 연주를 꼭 한 번 들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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