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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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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글쎄….”

 그는 시선을 거뒀다. 롯데그룹 세무조사 얘기를 꺼냈을 때다. 멀리 제주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더 커졌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제주포럼에 참석한 기업인 A는 말을 아꼈다. 익명으로 쓴다는 다짐을 몇 번 받고서야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거기는 신문에라도 나지, 우리 같은 기업은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맞아.” “건실한 기업인데 걱정할 게 뭐 있느냐”고 되물었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가 파도 소리를 덮었다. “다 불안하게 하는 게 문제지. 잘못이 있든 없든, 잘하든 못하든.”

 불안은 요즘 경제계를 짓누르는 단어다. 막연할수록 커지는 게 불안이다. B기업의 잘못이면, B의 문제로 규정해 고치면 된다. 징벌은 구체적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행사될 때 정당하다. 그런데 현실은 드러나지 않은 C도 그럴 것으로 치부한다. 과거 행적과 미래 개연성을 들먹이면서다. 전체가 하나로 묶이는 순간, 기업은 모두 떤다.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불안도 커진다. 탈루 혐의가 있는 D에 대해선 세무조사를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그러나 세무조사의 목적이 구멍 난 세수 채우기로 인식되면 불특정 다수가 불안해진다.

 형해화된 구분 짓기는 이런 불안을 더 키운다. 기업을 덩치에 따라 묶는 방식이다. 덩치가 큰 한 기업의 잘못은 덩치가 큰 기업 전부의 잘못으로 인식된다. 정치가 이 프레임을 만들고, 정부가 확대했다. 뭉뚱그리는 습관을 키운 데는 재계의 책임도 있다. 경제민주화가 정책의 한 축이 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런데 모든 법안을 하나로 묶어 “경제민주화 때문에 투자를 못 하겠다”고 하면 더 이상 건설적인 논의가 진행될 수 없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제주포럼에서 “법안별로 구체적으로 논의를 해야지 다 묶어놓고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반대 쪽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계는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 대상의 99%가 중소기업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고서야 정신이 든 듯하다. 그들은 그동안 세상을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나누는 프레임을 즐겨 왔다.

 불안을 없애려면 잘못한 기업, 문제 있는 기업을 명확히 해야 한다. 되는 기업은 되고 안 되는 기업은 안 되게 하면 그만이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게 최악이다. 다 묶어 기업, 다 묶어 중소기업, 다 묶어 대기업으로 뭉뚱그리면 답이 없다. 집합명사의 그늘에 안주하는 게 편하거나 대립 구도가 명확할수록 재미를 보는 집단만 이로울 뿐이다. 기업에 이름을 돌려주자. 그러려면 곧은 소리하는 기업, 괜한 오해를 받는 기업, 애꿎은 희생을 한 기업을 끝까지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 사정당국의 권한이 징벌이라면, 사정당국의 의무는 보호다. 그래야 엉뚱한 피해가 갈까 이니셜로 글을 쓰고, 익명 보도 확약을 받고서야 말문을 여는 일도 끝낼 수 있다.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