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남윤호의 시시각각

차별하는 놈은 싹 쓸어버려, 장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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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남윤호
논설위원

일본인 집에 초대받아 갔더니 슬리퍼를 신으라고 내놓더라. 외국인의 발이 마룻바닥에 직접 닿는 게 꺼림칙해서였나. 우치(內)와 소토(外)를 구분하는 일본문화가 잘 드러나더라….

 미국 유명 신문사의 도쿄특파원이 큰 발견이라도 한 듯 들려준 이야기다. 발 시리지 않게 또는 편하라고 권한 슬리퍼를 멋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는 도쿄에 오기 전 일본문화에 대한 책을 여럿 읽었다고 한다. 그게 지나쳐 실제 겪고 본 일들을 모두 책에 나온 관념의 틀로 재단하고 말았다. 먹물깨나 먹은 언론인도 한번 편견을 갖기 시작하면 이렇게도 맛이 가나 싶었다.

 남의 나라 문화에 대한 편견은 아예 모를 때보다 어쭙잖게 알 때 생긴다. 요즘 어설픈 한국문화 개론으로 아시아나항공의 사고 원인을 더듬는 미국 언론들이 그렇다. 일부 미국 언론이 보도한 한국문화론의 내용은 뻔하다. 위아래를 중시하는 권위주의와 순종주의, 상의하달식 불통체질, 여기에 존댓말 탓에 원활한 의사 표현이 어렵다는 언어장애론까지…. 이게 신속한 위기대응을 가로막았을 수 있다는 식이다. 객관적 사고원인에 대한 궁금증은 ‘아, 그거 걔네 나라 풍토병이지’ 하는 한마디에 가려지고 만다.

 한번 물어보자. 그럼 훨씬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서열이 센 군용기들은 매일같이 땅에 처박혀야 하나. 권위주의가 없다는 서양 파일럿들은 사고 위험을 아예 붙들어 매놨나. 존댓말에다 겸양어까지 복잡하게 쓰는 일본인들은 또 어떻게 조종간을 잡나. 그들의 한국문화론엔 구멍이 숭숭 보인다.

 복잡한 사회현상을 꼬치 꿰듯 한 큐에 설명하려는 유혹이 결국 문화결정론으로 흐르는 것 아닐까. 학계에서도 문화에 과도한 설명력을 부여한 사례가 적잖다. 1960년대 미국의 정치학자 가브리엘 알몬드와 시드니 버바가 내놓은 정치문화론이 대표적이다. 둘은 각국의 정치문화를 참여형·신민형·미분화형으로 나누고 참여형인 서구가 민주주의에 적합하다고 봤다. 좀 거칠게 말해 ‘잘난 놈은 잘났기 때문에 잘났고, 못난 놈은 못났기 때문에 못났다’는 말을 학술적으로 표현한 것뿐이잖나.

 한국·홍콩·대만·싱가포르 등 4마리 용으로 불리던 국가들의 성장 비결을 유교문화에서 찾는 시각도 비슷하다. 국가 주도형 경제발전에 유교적 가치관이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장구한 역사의 유교문화가 그동안 뭐 하다 이제야 국가 주도의 성장을 촉진했나. 또 유교문화가 경제발전에 도움을 준다면 왜 서양에 비해 산업화엔 뒤졌나. 유교문화론은 이 의문에 답을 못 준다. 드러난 결과에 대한 사후적 합리화에 그칠 뿐이다.

 물론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서 모든 답을 찾는 건 무리다. 자칫 문화 우열론이나 나아가 인종차별로도 이어질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KTVU라는 방송이 미연방교통안전위원회(NTSB)의 확인을 거친 아시아나 파일럿들의 이름이라며 인종차별적 농담을 내보낸 것도 그 연장선 아닌가. 이를 두고 미국의 인터넷에선 되레 ‘그게 농담이지 어떻게 인종차별이냐’며 반발하는 댓글이 많다. 조롱당하는 쪽의 심정을 무시한 채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는 태도가 인종차별 아니고 뭔가.

 그렇다 해도 이를 미국의 뿌리깊은 인종차별 습속으로 일반화해 매도하는 것 역시 오류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두 번이나 선출한 나라 아닌가. 어느 사회에나 너절한 3류가 있는 법이다. 우리나라에도 망발 앵커가 있지 않나.

 이처럼 문화로 모든 걸 설명하려는 태도는 어리석고 위험하다. 특히 이번에 불행한 사고가 난 판에 한국문화가 어떻네 하며 조롱하는 미국인들이 있다니 불쾌할 따름이다. 진득진득하게 스며드는 장마철 습기 같은 불쾌감이다. 이럴 땐 영화라도 보며 짜증을 삭여 보자. ‘장고: 분노의 추적자’가 안성맞춤이다. 그래, 바로 그거야, 장고, 인종차별하는 놈들일랑 싹 쓸어버려!

남윤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