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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 피해 5조 소송 패소 … 대법 "인과성 입증 불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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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12일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패소한 뒤 대법원을 빠져나가고 있다. [뉴시스]

12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2호 법정. 소송이 처음 제기된 지 14년 만에 고엽제 피해 배상 소송에 대한 대법원 선고 재판이 열렸다. 대법원 3부(주심 이인복 대법관) 재판장인 김신 대법관은 “오랫동안 치열하게 다퉈온 당사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라고 운을 뗀 뒤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현재 1만6579명의 원고 중 염소성여드름 증상을 보인 39명을 제외한 나머지 원고들의 질병과 고엽제에 포함된 다이옥신과의 인과성을 입증할 수 없다”는 요지였다. 염소성여드름은 고엽제 성분(TCDD)에 노출된 사람의 얼굴에 물집과 피지 같은 여드름이 생기는 증상이다.

 미국도 인정하지 않은 고엽제와 질병 간 인과관계를 세계 최초로 일부 인정하긴 했지만 범위는 극히 제한됐다. 1인당 600만~1400만원씩 모두 4억9000만원의 배상액이 책정됐다. 항소심은 6795명에게 607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었다. 김 대법관은 “딱한 처지만 갖고 판결을 할 수는 없었다”고 안타까워했지만 사실상 원고패소 판결을 내린 셈이다.

 1999년 9월 말 서울지방법원(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된 이 소송은 소송 참가자 1만7206명, 소가 총액 5조1618억원, 변호인단 100여 명 등 국내 민사소송의 각종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다. 피고는 60년대 말 베트남전에 사용된 에이전트 오렌지라는 제초제(고엽제)를 만든 다국적 화학기업 다우케미컬과 몬산토였다.

 고엽제에 노출된 군인과 민간인들이 5~10년 후 암과 신경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사실이 알려지자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국과 호주·뉴질랜드 군인들은 78년 미국 회사들을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했고, 중간에 소송을 취하하는 조건으로 2억4000만 달러를 보상받았다. 최대 참전국인 한국은 뒤늦게 이를 알고 93년에야 재미동포 변호사를 통해 소송을 냈다. 그러나 ‘소송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소 취하 명령을 받자 국내 법원에 다시 소송을 낸 것이다.

 쟁점은 세 가지였다. ▶고엽제와 원고들 증세와의 인과관계 ▶고엽제 노출로부터 10년이 지났다는 소송 시효 ▶재판 관할권이 한국 법원에 있느냐는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인과관계 입증을 위해 원고 전원에게 혈액감정을 받을 것을 요구했고 원고 측은 “1인당 수백만원씩 들어가는 혈액감정은 불필요하다”며 버텼다. 2002년 5월 재판부는 “인과관계를 확인할 수 없고, 시효도 지났다”며 원고패소 판결했다.

 4년 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2006년 1월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민사13부(부장 최병덕)가 “원고들이 주장하는 고엽제 후유증 가운데 염소성여드름을 비롯해 비호지킨임파선암·연조직육종암·호지킨병·폐암·다발성골수종·2형 당뇨병 등 11개 증상이 제초제 부산물인 다이옥신과 인과관계가 있다”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이들 질병과 다이옥신 사이에 역학적 상관관계가 있다는 미국 국립과학원의 역학조사 보고서가 중요한 뒷받침이 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상고심을 맡은 대법원은 선고를 차일피일 미뤘다. 사건이 복잡하고 검토할 기록이 많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대법관들이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대법원은 상고 7년 만인 이날 항소심 판결을 대부분 뒤집는 최종 결론을 내놓았다. 재판부는 “ 질병 중 염소성여드름은 고엽제 노출과 분명하고 직접적 인과관계가 있다고 증명됐지만 나머지 질병들은 다양한 유발요인이 있는 만큼 꼭 고엽제 때문에 발병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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