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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산책] 바람의 아들, 다시 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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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사진=양광삼 기자

"아따, 그만 하고 가자. 구(천서) 코치 지치겄다."

지난달 29일 오후 광주 무등야구장. 프로야구 기아 타이거즈의 장채근 코치는 이종범(34)을 향해 연방 "그만 가자"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배팅볼을 치던 이종범은 한자로 '참을 인(忍)'자가 새겨진 배트를 멈추지 않았다.

이종범이 다시 뛴다. 올 시즌 시범경기 9경기에서 24타수 11안타(0.458)로 타격 1위에 올랐고, 도루도 4개다. 부활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고, 올 시즌 기아가 우승한다면 그 덕분일 것이라고 한다.

이종범은 지난 시즌 타율 0.260에 홈런 17개, 도루 42개를 기록했다. 평균은 했다고 할 만하지만 '야구천재' 이종범으로서는 부끄러웠다. 그래서 구단의 연봉 삭감(4억8000만원→4억3000만원)도 달게 받아들였다. 연봉 삭감은 그에게 '장작(薪)'과'쓸개(膽)'였다.

◆바람의 아들

야구공을 잡은 지 벌써 27년째. 그는 광주 서림초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동네축구가 지겨웠던 차에 야구부 훈련을 지켜보다 '필'이 꽂혔다. 그는 아버지(이계준.77)에게 "야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공부와 담을 쌓고 살던 그였기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허락했다.

광주제일고 3학년 때 청룡기와 전국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건국대.해태를 거쳐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에 진출할 때까지 '이종범'이라는 이름 석 자는 한국 야구의 희망이자 흥행 보증수표였다. 1994년의 기록을 보자. 그는 0.393의 타율에 196안타, 84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지금도 깨지지 않는 시즌 최다 안타와 최다 도루 기록이다.

◆이치로는 천재예요

세상은 자연스레 이종범을 일본의 '야구천재' 스즈키 이치로(시애틀 매리너스)와 비교했다. "인생의 라이벌을 꼽아보라"고 했더니 한참을 망설이더니 "글쎄요, (유)지현(LG)이 정도면 라이벌이 될까요"라고 의외의 대답을 했다. 아예 대놓고 "이치로를 라이벌로 생각하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이치로는 천재입니다. 야구의 고정관념을 바꿨잖아요. 힘이 판치는 메이저리그에서 동양인이 정상에 올랐는데요. 저와는 스타일이 달라요. 라이벌이라기보다는 배울 점이 많지요."

그는 97년 당시 프랑스에서 디자인 공부를 하던 부인 정정민(34)씨와 결혼해 아들 정후(7)와 딸 가현(6)을 낳았다. 그는 자신을 닮아 운동에 재능이 있는 정후에게 골프를 가르치고 싶었다. 부인은 공부를 시키고 싶어한다. 그렇지만 정작 정후의 장래희망은 야구선수다. 부부가 모두 말려 봤지만 어린 녀석이 막무가내다. 정후 방에는 '258'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는 이치로의 사진이 걸려 있다. 바로 지난 시즌 이치로가 세운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안타수(종전 257개.이치로의 시즌 최종 안타수는 262개)다.

"아내가 애한테 그러더라고요. '이치로보다 잘할 자신이 있으면 야구를 하라'고. 이종범이 아니라 이치로보다요."

◆세 번의 위기

세 번의 위기가 있었다. 고교 2학년 때 재미삼아 야구부원끼리 축구를 하다 뒤통수에 공을 맞고 쓰러졌다. 뇌진탕이었다. 꼬박 36시간 동안 의식불명이었다. "죽었다가 살아나니까 무서운 게 없었어요. 야구에 목숨을 걸 정도로 집중하게 된 계기였죠." 두 번째 위기는 98년 일본에서 공에 맞아 팔꿈치 골절을 당했을 때다. "감각이고 컨디션이고 다 떨어지는데 헤어나올 수가 없었어요. 탈출구는 안 보이고, 그렇다고 돌아갈 수는 없고. 2군으로 떨어졌을 때는 가슴 속으로 매일 울었어요." 세 번째가 국내에서 가장 부진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친 지난해다.

?야구는 골프에 비해 너그럽다

그는 일본에서 골프를 배웠다. 주니치 시절 당시 팀 동료였던 선동열 현 삼성 감독과 프로골퍼 고우순씨가 동행이었다. 한국에 와서는 비시즌 중에만 즐긴다는 그는 보기 플레이어(85~90타) 수준이라고 했다. 그가 골프와 야구를 놓고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야구는 골프에 비해 너그러운 종목입니다. 야구는 파울이 나면 한번 더 쳐요. 그런데 골프는 OB(Out of Bounce) 나면 끝이죠. 한국 선수가 일본에서 부진한 거요, 일본인 눈에 그건 파울이 아니라 오비예요."

◆헤드퍼스트 슬라이딩도 하겠다

이종범은 올해 두 가지를 바꾸기로 했다. 2002년 몸에 맞는 공에 광대뼈가 함몰된 뒤 착용해온 검투사 헬멧을 벗기로 했다. 또 최근 몇 년간 '어떻게 이 나이에…'라고 생각해 하지 않았던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하기로 했다. "해태 시절에는 공식연습 3시간 전부터 운동장에 나와 훈련했어요. 이를 악물고 뛰었죠. 그때 얘기 후배들한테 해줘도 못 알아들어요." 그는'솔선수범'이라는 고전적인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인터뷰 말미에 올 시즌 목표를 물었다. '개인 성적보다는 팀 우승'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94년에 세웠던 최다 안타와 최다 도루 기록을 한번 깨보렵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장채근 코치가 웃었다. "아따, 종범아, 그라믄 니 4할 치겄다."

광주=장혜수 기자 <hschang@joongang.co.kr>
사진=양광삼 기자 <yks23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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