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0)캄보디아서 돌아온 박정환소위 수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군형무소에 수감된지 4개월만인 68년 11월19일아침, 감방장이 우리를 호명했다. 공판을 받으러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실감이 나지않는 느낌으로 수갑차인채 다른 20여명의 죄수들과 함께 법정에 출두했다. 우리들에 대한 간첩죄사건이 맨 먼저 심리되었다. 기소장낭독에 이어 준위의 통역을 통해 신문이 시작되었다.

<뭣때문에 들어왔느냐, 재판때 채씨는 울기만>
신문은 주로 우리가「캄보디아」에 무엇때문에 어떤방법으로 들어왔느냐는데 쏠렸다. 검찰관은 시종 능란한 말주변으로 우리를 국제간첩으로 몰았다. 나는 여러번 간첩이 아니라는것을 성의있게 설명하면서 「캄보디아」의 우정으로 대한민국에 돌려보내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진정했다. 판사에게 이말을 할때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채씨는 재판이 시작될때부터 내옆에 선채 어린이처럼 훌쩍훌쩍 울기만했다.
재판은 약 두시간쯤 끌었다. 10분동안 휴정한 다음 다시 재판정에 들어섰을때 통역인 준위는 쪽지에 「6년」이라고 써보이면서 우리들에게 내려진 양형이 6년임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예상했던터라 그리 놀라진 않았으나 그 통역에게 『너도 우리를 간첩으로 보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준의는 쓴 웃음을 지으면서 『나는 모른다』고 하고 밖으로 나갔다. 판사로부터 6년의 형을 선고받음으로써 우리들에 대한 재판은 단하루에 끝났다. 나는 그날밤 형무소에 돌아가서 변소안에 들어가 『조국이여, 빨리 우리를 구해주소서』하고 기도를 드렸다. 조용한 곳이라곤 변소뿐이었기 때문에 기도를 할때마다 변소에 가는것이 습관이 되었다.
무료한 나날이 미련없이 지나갔다. 12월들면서 몹쓸 피부병과 폐렴을 앓아 내 건강은 말이 아니었다. 체중이 10kg가량줄어 50kg이 되었다. 그러나 고국에 돌아간다는 희망은 잃지 않았다.
어느날「시아누크」공의 친척인「캄보디아」정부의 한 장관이 군형무소를 시찰했다. 그가 마지막차례에 우리방을 들렀을 때였다.

<월남전끝나야 보낸다 친력약화에 피부병도>
나는 그가 방을 둘러보고 막 나가려는 무렵 용기를 내어 『질문을 해도 좋으냐』고 영어로 물었다. 그는 되돌아서면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억울하게 복역을 하고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고국에 돌아갈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며 『서신이라도 가족들에게 전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랬더니 그는『월남전이 끝나면 3개월안에 너의 가족들 품으로 돌아갈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하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악수를 할때 내손에 누렁지처럼 다닥다닥 곪은 피부병을 보고 감방장에게 즉시 치료해주라고 명령한 뒤 감방을 나갔다. 그 덕분으로 나는 매일 피부병치료를 받았다. 어느날 내게 친절히 간호해주던 간호원이 『왜 매일 치료를 하는데도 낫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하길래 『나는 자유세계 사람인데 주사약은 소련제이니 병이 나을수 있겠느냐』고 빈정댔다. 그들이 쓰는 의약품은 대부분 소련제였다.
12월들어「뉴엔·비에꺼」라는 전직 월남군소위가 「라오스」로 간다기에 내방으로 끌고가서 편지를 「라오스」주재 미국대사관에 전해주면 1천5백「달러」를 주기로 약속하고 편지를 그의 양말속에 넣어주었다. 그는 『두달후에는 꼭 소식이 있을것』이라고 말하면서 12월28일 출옥했다. 먼 이방의 하늘아래서 세모를 맞기란 괴로운 일이었다.
69년 정초의 새아침. 새해에는 꼭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지긋지긋했던 지난해의 악몽에 『아듀』를 고했다. 그뒤 감방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4월 13일은「캄보디아」의 설날이었는데 이날에 들뜬 죄수60여명이 탈출을 기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 때문에 죄수들이 몹시 얻어맞기도 했다.
5월들어 어찌된 영문인지 시력이 자꾸 약해졌다. 활자가 전혀 보이지 않을만큼 악화되었다.
나는 형무소소장에게 내눈을 치료해 줄것과 「시아누크」공에게 직접 우리의 석방을 진정할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눈의 치료와 좋은 방으로 옮겨준다는 것밖에는 이렇다할 약속을 해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채씨와 따로 수용되었다. 새방에서는 미국에서 오래 ,유학한 「소리·캐모니」라는 「캄보디아」중년신사와 함께 있게 되었다.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는데 국가보안을 해쳤다는 이유로 징역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시아누크」공을 퍽 칭찬했다. 나는 그로부터 특히 「캄보디아」의 역사와 불교사상을 많이 배웠다. 나는 그를 존경했으며 그도 나를 몹시 아껴 주었다.

<장교대우 못해 미안, 호대사관서 자유첫밤>
6월14일아침. 여느때처럼 나는 「소리·캐모니」와 종교에 관해 토론하고 있었다. 이때 「캄보디아」의 죄수 한명이 『꼬레·떠어브떼아』(한국인이 집에 간다)라고 말하는 것을 무심결에 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봤다. 채씨가 이발하는 도중에 형무소부소장이 「캄보디아」어로 말하는 것을 귀담아 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사실을 가릴 여지도 없이 기삐 어쩔줄을 몰라서 방바닥을 마구쳤다. 「캐모니」는 내손을 꼭잡으면서 함께 기뻐해 주었다. 나는 기쁨에 겨워 눈물믈을 홀렸다. 그날 하오 4시쯤 소장이 나를 불렀다. 내가 소장방에 가보니 소장실과 가까운 방에 있던 채씨가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더듬더듬한 영어로 16일아침 우리를 「오스트레일리아」대사관에 태워다 줄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노드」인지 「소드」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농담을 하며 웃었다. 그는 작업복 한벌씩을 우리에게 내주며 『장교 대우를 못해주어 미안하다. 지금 병은 어떠냐』는등 다정스럽게 굴었다. 그는 소장의 권리로 이 시간부터 자유를 줄터이니 밖에 나와서 자라고 생색까지 냈다.
그러나 나는「캐모니」와 떨어지기가 싫어서 그날 밤만은 석별의 정을 나누며 같이 자고 싶었다. 그 이튿날은 우리의 몸에 알맞도록 옷을 줄여입었고 구두와 양말도 한켤레씩 지급받았다. 16일아침 나는 「소리·캐모니」를 비롯한 모든 죄수들과 『키뇸·솜·리어션·허이』(안녕히들 계십시오)하며 일일이 석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나는 특히 「캐모니」씨의 손을 잡고 『Good-bye, my elder brother!』하며 눈물을 머금고 헤어졌다.
우리는 소장의 차를 타고 「프놈펜」 시를 한바퀴 돈뒤 식사후 군검찰청에 갔다. 나는 형무소소장에게 『친절한 대우에 깊이 감사한다』고 인사했다.
그런다음 국방부를 잠깐 들러 외무부로 향했다. 그곳엔 많은 「카메라맨」들이 모여 우리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캄보디아」의 외무부 장관과 「오스트레일리아」대사가 우리의 신병을 인수인계했다. 서명이 끝나자 「캄보디아」의 외무부장관은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조국에 돌아가는 소감이 어뗘냐』고 물었다. 『나는 「캄보디아」국의 현명한 결정에 대해 몹시 감격한다』고 말하자 그는 몹시 기뻐했다. 「오스트레일리아」대사관에 도착한 우리는 직원인 「맨틀」씨 집에서 자유의 첫밤을 푹 쉬었다.
「맨틀」씨와「윌리엄즈」라는 사람은 몹시 우리에게 친철했으며 나는 그곳에서 자유우방국가의 뜨거운 우정을 새삼느꼈다. 정말 꿈만 같았다.

<중공제샤쓰 줄 땐 분노, 반공정신 칭찬받기도>
그는 내가 월남군 장교 「비에꺼」씨를 통해 「라오스」로 보낸 내 비밀영문서신을 직접 보았다고 하면서 나에게 매우 친철했다. 거기서 1박후 「오스트레일리아」대사관에서 준 「러닝샤스」를 입으려고 했었을때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샤스」의 상표가 중공제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즉시「샤스」를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채 서있으니 「맨틀」씨가 방에 들어와서 놀란 표정으로 『왜 옷을 입지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중공제는 입을 수 없다고 하자, 그는 자기도 알고 있다면서 「캄보디아」에는 중공제 외에는 없다고 했다. 가위로 상표를 잘라내고 입으니 그는 우리의 몸에 밴 반공정신을 보고 무척 감탄했다. 상오11시 우리는 「오스트레일리아」대사관직원들의 조심스런 경호를 받으며 「캄보디아」공항에 나가 「에어·베트남」「제트」여객기를 타고 「캄보디아」를 떠났다.
『비록 고통스럽고 괴로웠지만 그래도 나를 많이 깨우쳐준 정든 「캄보디아」! 「키뇸·솜·허이」(잘있거라)』하며 창밖에 손을 흔들었다.
비행기가 떠나자 우리 인솔자 「월리엄즈」씨는 『북괴 대사가 바뀔거야』하고 목에 손을대며 왼쪽눈을 살짝감고 씽긋이 웃어보였다.
비행기는 약15분후 태국「방콕」에 착륙하자마자 조그맣고 동그란 비행기 창문을 통해 태국주재 한국 대사관차에 달린 태극기를 보고 그만 치미는 눈물을 가눌수없어 울어버렸다.
그러자「윌리엄즈」씨는『이제 너는 조국으로 간다』고 위로했다.
『오! 그리운 조국! 얼마나 자나깨나 그리던 내 사랑하는 조국이냐?
나는 조국의 위대함속에 다시 태어나서 나의 조국 대한민국으로 간다.
나의 조국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내 사랑하는 국민과 함께 마음껏 부르짖고 싶구나.
아! 나의 조국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나를 「캄보디아」로부터 구출해주신 대통령각하와 국민 및 정부각기관, 언론기관에 끝없는 감사를 드리며, 미국「오스트레일리아」「필리핀」 영국 태국등 여러 자유우방국가의 따뜻한 우정에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우리를 인도적으로 조국에 돌려 보내주신 「시아누크」공과 그의 「캄보디아」에 대해서도 감사드리며 주월한국군 사령관님이하 저의 전우인 주윌한국군에 끝없는 용서를 빌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글로써 저의 겪은 일들을 사실대로 간추려 간단히 말씀드리고 국민에게 고마움을 인사드립니다. <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