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노트북을 열며

보수의 제1덕목이 책임인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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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

보수주의의 원조 격인 에드먼드 버크는 저서 ‘프랑스 혁명의 성찰’에서 “소유하고 있는 상태의 이익과 새로운 계획의 이익이 같을 땐 변화를 선택할 이유는 없다”는 글을 남겼다. 프랑스 대혁명을 비판하면서다. 이를 보수 진영과 새누리당에서 제기하는 ‘서해북방한계선(NLL) 포기’에 대입하면 생각할 대목이 많다. NLL에 관한 한 대한민국은 이미 ‘소유하는 상태의 이익’을 갖고 있다. 이를 지키려 얼마나 피를 흘렸던가. 그렇다면 ‘NLL 포기 공인’이라는 ‘새로운 계획’이 국익에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따져봐야 한다.

 국정원이 공개한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엔 보수의 정서를 자극하는 표현이 곳곳에 등장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NLL을 ‘괴물’에 비유했고, 국제법적 근거 부족도 거론했다. 그래서 보수 진영과 새누리당에선 “포기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NLL 포기라고 ‘공인’하는 순간 그 뒷감당이 만만치 않다. 6년 전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함께 서명한 10·4 남북정상선언 3항에는 “남북은 서해에서 우발적 충돌 방지를 위해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이를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한 방안 등을 협의하기 위해 군사회담을 개최한다”고 명기돼 있다. 그래서 ①노 전 대통령이 NLL을 포기했다→②노 전 대통령과 김 국방위원장이 공동어로구역 설치를 합의했다→③그러므로 10·4 선언 3항은 NLL 포기가 전제돼 있다는 논리로 전개됐다간 누구도 원치 않는 희한한 사태가 올 수도 있다. 북한은 늘 약속을 안 지키니 우리가 무감각해서 그렇지 10·4 선언은 정상 간의 선언이다.

 노 전 대통령은 2004년 11월 방미 때 “북한 핵 보유 주장엔 일리가 있다”고 하며 파란을 부른 적도 있다. 실제로 북한이 이 발언에 고무돼 핵을 개발해도 저항이 적으리라 오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누구도 이를 “북한은 핵을 가져도 된다”고 공식화하지 않았다. 그러는 순간 정말로 북핵을 용인하는 게 되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이후 대한민국의 북핵 정책이 ‘북핵 허용론’으로 바뀐 적이 있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보수는 노 전 대통령이 대단히 부적절한 뉘앙스로 발언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대한민국이 NLL을 포기했다고 국내외에 공인하는 단계까지 나가선 곤란하다. 어쨌든 노 전 대통령은 국민이 선택한 대한민국의 대표자였다. 이를 무시하면 NLL을 지키려다 NLL을 흔드는 게 된다.

 정상회담 대화록이 공개된 뒤 보수나 진보나 모두 NLL이 기준선이라고 선언했으니 국민적 합의는 확인됐다. 그렇다면 보수를 지향하는 새누리당은 이제는 어떻게 ‘포기 발언’의 근거를 찾아낼까 궁리하기보다는 어떻게 출구를 만들어 NLL을 지킬까를 고민하는 게 ‘보수적’이다. 진보는 모두가 침묵할 때 입을 여는 용기로 인정받지만 보수는 모두가 떠들 때 절제하는 책임감으로 믿음을 얻는다. 뭐니 뭐니 해도 보수의 제1덕목은 책임지는 데 있다.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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