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차카게 살자"는 주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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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권석천
논설위원

문제 : 다음 ○○에 들어갈 단어는?

7월 3일 안전행정부, ○○가격업소 홍보대사 위촉

7월 8일 현대차, ○○가격 정책 확대

8월 1일 경찰청, ○○운전 마일리지 시행

 정답은 ‘착한’이다. 요즘 정부도, 지방자치단체도, 기업도 이 단어를 애용하고 있다.개념 설명을 하자면 착한가격업소는 ‘해당 지역에서 평균 가격 이하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소’다. 주관 부처인 안전행정부는 “업소 간 자율 경쟁으로 물가안정과 서민경제 살리기에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국민 첫사랑’ 수지를 홍보대사에 앉히고 지정 기준을 강화해나갈 방침이다. 앞서 서울시는 착한가격업소 ‘착한 가게’ 1092곳을 선정했다.

 경기도는 이 제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이름하여 ‘착한가격업소 힐링 프로젝트’. 이달부터 4개월간 창업희망자가 착한가격업소에서 인턴으로 일하면 업소엔 기술보급료로 월 50만원을, 창업희망자에겐 하루 2만5000원을 준다. 경찰청의 착한운전 마일리지는 운전자가 도로교통법 준수를 약속한 뒤 1년간 실천에 성공하면 벌점과 면허정지 일수를 줄여주는 제도다. “교통문화 개선 차원에서 운전자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기 위한 것”이다.

 ‘착한’이란 형용사는 힘이 세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몸매부터 식당, 금융, 분양가, 뉴스, 욕심까지 현존하는 모든 명사를 수식할 수 있다. 동반성장위원회는 제과점업 등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한 뒤 “착한 결론을 맺었다”고 자평했다. 한 노동단체는 철도 민영화 반대 성명에서 “코레일의 적자는 싼값에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착한 적자”라고 했다.

 재계의 핫 트렌드도 ‘착한 경영’이다. 기업인들에 대한 재판과 검찰 수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대규모 정규직 전환, 정규직 시간제 일자리 전환 같은 뉴스들이 잇따르고 있다. 국회에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착한 기업’ 유도 법안이 발의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착한’ 시리즈가 유행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일하고, 먹고, 소비하는 모든 면에서 믿음을 갖기 어렵다. 올 들어 잇따른 갑을관계 논란 속에 계층 간 적의(敵意)는 부풀어 오르고 있다. ‘착한’의 만연은 그만큼 세상살이가 각박해지고 살벌해졌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착함이란 윤리적 기준을 경제 활동에까지 도입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또 그것을 정부가 주도하는 게 바람직할까.

 서민생활 안정이 목표라고 하지만 정부와 지자체가 인센티브 내걸고 업소 지정을 하는 건 문제가 있다. 보다 세련되게 진화된 물가 단속의 혐의가 짙다. 지정받지 못한 업소들의 박탈감을 키우게 된다. 지난주 식당에서 저녁을 먹다 주인에게 물었다. 왜 착한가격업소로 지정되지 않았느냐고. 주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저희는 뭐 나쁜 가격 업소인가요? 저도 좋은 음식, 싸게 드리고 싶지만 채소값이….”

 갑을관계도 마찬가지다. 승무원 타박하는 상무든, 장지갑 휘두르는 회장님이든 우린 그들에게 착해지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최소한의 법과 상식을 따르라는 얘기다. 경제적 거래에 개인적인 도덕관념을 덧입히고, ‘착한 기업’ 코스프레를 하라는 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기업과 자영업자는 경쟁력 키워서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제값에 팔고, 정부와 시민은 기업이 제대로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는지 철저하게 감시해야 한다. 착함보다 유능함이, 윤리보다 준법정신이 필요한 영역이다.

 “세상에는 도덕적인 책도, 부도덕한 책도 없다. 잘 쓴 책과 그러지 못한 책이 있을 뿐이다”(오스카 와일드). 모든 것을 도덕성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착각은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함정이다. ‘차카게(착하게) 살자’는 주문을 외운다고 현실이 착해지지는 않는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