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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란 먹고, 사이다 마시며백두대간 초록천지로 덜컹덜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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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호 08면

1 달리는 V트레인에서 바라본 백두대간의 비경.

기차 여행은 색다른 맛이 있다. 거침없이 레일 위를 질주하는 호쾌함, 기분 좋게 흔들리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누리는 나른함,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옆 칸으로 잠깐 ‘마실’ 다녀올 수 있는 여유로움, 그리고 출출하면 꺼내 먹는 삶은 계란과 사이다의 든든함과 짜릿함까지-.
코레일이 3월 15일 개통한 중부내륙 관광열차는 여기에 아기자기함까지 더했다. 외관부터 객실 구석구석까지 일반 열차와 전혀 다른 디자인으로 새롭게 만든 국내 최초의 관광 전용 객차다. 평소 가보기 힘들었던 중앙선·태백선·영동선을 따라 백두대간의 비경을 엿보는 흥미진진한 코스는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개통 100일을 맞은 6월 22일 현재 이미 5만9008명이 이용했을 정도로 커다란 인기다.
6월 20일 오전 7시45분 서울역을 출발하는 중부내륙 순환열차 O트레인에 몸을 실었다. 대한민국 문화계 대표 인사들과 함께였다. 처음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다들 설렜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신록이 어느새 녹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중부내륙 관광열차로 떠나는 피서

2 O트레인 기관석. 앞에 카메라가 달려 있다. 3 한옥으로 지어놓은 영월역. 4 고한역. 5 시골 간이역 분위기가 물씬 나는 양원역.

잠깐 졸았다 눈을 떠보니 기차는 어느새 제천을 지나 영월역으로 향하고 있다.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는 석회석 가루 더미들이 창밖을 언뜻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제천부터 백산에 이르는 태백선은 일제 강점기 이후 석탄과 석회석, 목재 등을 실어 나르는 전통적인 산업 철도다. 이 코스를 근사한 관광코스로 탈바꿈시켜 강원 남부와 충북·경북 북부 지역경제 회생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것이 코레일의 복안이었다.
지금도 화물열차가 주로 다니는 태백선·영동선·중앙선 일부를 동그랗게 이어(257.2㎞) 하루 4차례 순환하도록 만든 것이 O트레인. 이 중 경북 분천·양원·승부역과 강원 철암역 등 백두대간 오지 노선(27.7㎞)을 하루 3회 왕복하는 것이 협곡열차인 V트레인이다. 이 O트레인과 V트레인을 합쳐 중부내륙 관광열차라 부른다.

6 O트레인의 열차 카페 내부. 7 O트레인 내부의 어린이 놀이 시설. 8 5월 24일 문을 연 삼탄 아트 마인. 폐광 시설을 문화예술공간으로 개조했다. 9,10 삼탄아트센터 내부.

그런데 이 열차, 모양새가 남다르다. 동그란 앞모습 덕분에 ‘다람쥐 열차’라고도 불리는 O트레인은 모두 4량으로 구성돼 있는데, 돌아다녀 보니 칸마다 구성이 제각각이다. 의자를 창문 쪽으로 향하게 하고 칸막이를 설치한 커플석과 팔걸이를 갖춘 널찍한 회전 전망석 의자가 독특했다. 목마·자동차 같은 놀이기구와 간이침대는 어린이 승객을 위한 것이다. 객석은 총 205석으로 넉넉하다. 의자 색깔도 청록·진분홍·황금색 등으로 다채롭게 꾸몄다. 천장에는 붓글씨체로 다양한 시를 적어 놓았다. “한국적 미를 담아내고자 했다”는 게 프랑스 디자이너 펠릭스 부코브자의 기획 의도다.

11 현대미술관 CAM 내부, 왼쪽에 중국 작가 우카오종의 ‘Boots’가 보인다. 12 세계미술품 수장고 내부.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둘째 칸인 열차 카페. 유리를 알록달록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해 관광열차의 분위기를 한껏 살렸고 미니 편의점을 설치했다. 창가 쪽으로 스탠드를 만들어 풍경을 보며 식도락을 즐길 수 있게 했다. 떡갈비 도시락이 1만원, 두부 스테이크가 7000원.

13 V트레인 내부. 최대한 넓게 만든 유리벽 덕분에 주변 풍광이 잘 보인다. 14 V트레인 승무원들. 15 태백석탄박물관을 찾은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왼쪽에서 넷째), 소설가 김홍신(왼쪽에서 다섯째)씨 등 문화계 인사들.

객차 내부에 설치한 LED TV 화면에서는 기관석에 설치한 카메라가 보여주는 선로 전방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덕분에 최고 시속 186㎞로 달린다는 기차의 속도감이 실감나게 느껴졌다. 고범석 코레일 문화홍보처장과 함께 기관석으로 들어가 보았다. “곡선 구역에서는 60㎞로 운전한다”는 기관사의 설명. 기적 소리가 독특했다. 그냥 “빠앙~” 할 줄 알았는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곡조다. “철로 주변에서 보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바꿨다”고 한다.

어느새 1차 기착지인 고한역이다.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소설가 김홍신, 쉼박물관 박기옥 이사장, 박준영 전 국악방송 사장, 최종수 추사기념사업회 회장, 윤청하 전 동국대 객원교수, 윤호미 호미초이스닷컴 대표, 사진작가 이은주, 지동훈 유럽코리아재단 이사장 등이 차례로 열차에서 내렸다. 강원도 정선의 공기는 옥수수를 막 삶아낸 듯 구수했다.

삼탄 아트 마인, 폐광에서 피어난 예술혼
버스로 15분쯤 이동하니 ‘삼탄 아트 마인’이 나왔다. 2001년 폐광된 삼척탄좌 정암광업소를 정선군이 2009년부터 120억원을 들여 문화예술 공간으로 개조한 곳이다. 폐광을 문화공간으로 바꾼 독일 에센 지역의 졸페라인 뮤지엄을 모델로 삼아 지난 5월 24일 문을 열었다. 삼탄 아트 마인의 김진만 전무는 “옛날에는 이곳이 석탄 캐는 광산(마인)이었지만 지금은 예술을 캐는 광산이 되길 바라는 염원에서 이같이 이름 붙였다”고 설명했다.
공동샤워실과 장화 닦는 세화장이 있던 사무동은 현대미술관 CAM·작가 레지던시 등이 들어선 삼탄아트센터가 됐다. 대표적인 민영 탄광으로 한때 3000명이 넘는 광원들이 있었던 세월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었다. 그 흔적을 최대한 살려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의도가 강하게 엿보였다. 당시 월급 명세서 같은 서류 더미를 비롯해 산소통과 산소호흡기, 발파기계, 검정 장화와 헬멧 등은 그대로 설치 작품이 됐다. 광원들의 가슴 X선 사진을 둥글게 말아 천장에 매달아 놓은 공간 역시 깊은 울림을 주었다.

현대미술관에서는 손끝이 검게 물든 목장갑 수백 개로 만든 홍익대 정경연 교수의 작품, 털이 숭숭 삐져나와 있는 발로 광원들의 마음을 대변한 듯한 중국 작가 우카오종의 ‘Boots’ 등이 시선을 붙들었다.
세계미술품 수장고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전시 기획자이자 컬렉터로서 삼탄 아트 마인을 운영하고 있는 ㈜솔로몬의 김민석 대표가 30여 년간 150개국을 돌아다니며 모았다는 것들로 10만 점이 넘는단다. 범선 모형부터 대형 비너스 석상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석탄 캐던 수평갱을 천연 와인저장고 동굴로 바꾼 ‘동굴 와이너리 뱅[VIN]’에서는 으스스할 정도의 냉기가 흘러나왔다. 해발 832m에 위치하고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진 ‘레스토랑 832L’에서는 신선한 고랭지 채소를 듬뿍 곁들인 점심 식사가 나왔다.
버스를 타고 석탄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우리 땅에서 나는 온갖 광물의 실물을, 그리고 채광의 고단함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태백시 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고 있는 신동일씨는 ‘막장’이란 말을 함부로 쓰지 말아달라고 했다. “석탄을 캐는 곳의 온도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35도입니다. 일 끝내고 장화를 벗으면 땀이 물처럼 주르륵 하고 흘러나오죠. 새까만 탄가루를 마셔가며 일하다가 ‘땅속에서 불을 훔쳐낸 죄’로 폐를 뜯겨 죽는 형벌에 처해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시속 30㎞로 즐겨 보는 백두대간의 여름
다시 버스를 이용해 철암역에 도착했다. 이제 V트레인을 타러 갈 차례. V트레인은 디자인이 한층 더 독특하다. 디젤기관차의 겉을 흰색으로 칠하고 검정 줄무늬를 쓱쓱 그려 넣어 별명이 ‘아기 백호’다. 시야 확보를 위해 벽면에 최대한 유리를 설치했다. 지붕에는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했다. 1량당 하루 평균 5㎾의 전력을 생산해 각 객실에서 사용되는 조명, 선풍기, 승강문 작동에 쓰인다. 노선이 길지 않아 화장실은 없다.
진홍 철쭉빛 열차의 내부는 복고풍이다. 158석의 좌석은 초록색 등받이, 주황색 받침, 하늘색 다리 등 원색의 단순한 맛을 살렸다. 창문은 양손으로 꼭지를 눌러야 오르내리는 옛날 스타일이다. 에어컨은 없고 대신 천장에 붙은 선풍기가 돌아가는데 창문을 열어도 좀 후덥지근했다. 겨울용 친환경 목탄 난로가 갑자기 더워 보였다.

열차가 출발하자 각각 연두색·노란색 티셔츠 차림에 카우보이 모자를 쓴 젊은 남녀 승무원들이 마이크를 잡고 주변 경관을 설명했다. 감상을 위해 시속 30㎞로 천천히 운행한다.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등 신나는 노래가 울려퍼지자 분위기는 한층 흥겨워진다. 하늘색 천장에는 별 모양, 하트 모양의 야광 스티커를 붙여놔서 터널을 지나갈 때면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분천역에서 내려 다시 O트레인으로 갈아탔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들어오니 훨씬 살 것 같았다. 속도가 빨라지자 기분도 상쾌해졌다.
이날 행사의 좌장인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은 “오늘 이렇게 기차로 국토를 주유하니 옛 선인들의 풍류가 생각난다”며 ‘난중일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의미로 가객 문현씨에게 ‘한산도’라는 시조를 읊어줄 것을 요청했다. 또 김세종 다산연구소 연구원은 이날 행사의 의미를 즉석에서 가사로 지어 창을 했다. “우리 산천 금수강산 이런 경사를 맞을쏘냐~.”
소설가 김홍신씨가 “나이 들수록 인연을 예쁘게 갈무리해야 한다”며 “자기 스스로 인간 명품이 되어 다른 사람과의 소중한 인연을 지켜나가자”는 말로 자리를 마무리했다.

열차가 잠시 추전역에 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역(해발 855m)이다. 일행이 모두 내려 기념촬영을 했다. 기차가 바로 떠날 것 같아 얼른 자리로 돌아와 앉았는데 사람들이 차를 타지 않는다. 알고 보니 이곳에서는 10분간 정차한다고 했다. 아마 졸다가 못 들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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