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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에 묻힌 조선의용군 활약 재평가 받았으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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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호 24면

1 조선의용군 최초의 주둔지였던 흥복사 인근 마을 어귀의 담벼락에 남아 있는 항일 구호.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라고 적혀 있다. 2 호가장을 찾은 역사 탐방 프로그램 참가자들. 3 조선의용군은 일본군이 수색을 나오면 중국인 가옥에 숨곤 했다. 우물처럼 생긴 동굴에 현지인이 직접 내려가 시범을 보여 줬다. 4 진기로예열사능원에 안장돼 있는 윤세주 열사의 묘. [사진 써니 리]

지난 1일 오전 6시가 채 안 된 새벽시간. 중국 베이징(北京)의 대학가인 우다오커우(五道口) 사거리에 배낭을 멘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베이징대와 인민대·중앙민족대 등에서 유학 중인 한인 대학생들과 현지 연수 중인 한국인 공무원, 하루 전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서울대생, 미국에서 온 한인 교포도 있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은 미리 대기한 대형버스를 타고 남서쪽으로 향했다. 점심은 버스 안에서 햄버거로 해결했다. 일정표에는 ‘차량 이동시간이 긴 관계로 많은 음료수 섭취를 자제해 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중국 내 항일 유적지 3박4일 탐방기

버스 운전기사도 익숙지 않은 길을 헤매며 달리기를 무려 10여 시간. 그들은 무엇을 보려고 달려간 걸까. 목적지는 베이징에서 400㎞쯤 떨어진 허베이(河北)성 한단(邯鄲)지역이었다. 일제시대 중국 팔로군(훗날 인민해방군)과 연합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조선의용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번 여정은 베이징대 한국유학생 연구생회가 마련한 나흘 과정의 ‘역사 탐방’ 프로그램이었다. 참가자는 40여 명. 탐방의 주 목적은 한·중 수교 이전까지 가려져 있던 중국 내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를 훑어보는 것이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독립투사뿐 아니라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독립운동 투사들의 흔적도 포함됐다.

덩샤오핑, 조선의용군 확보한 퇴로 이용
첫 번째로 찾은 곳은 조선의용군 활동의 근거지였던 호가장(胡家庄)이었다. 여기에는 독립운동가 김사량(金史良)과 김학철(金学铁)의 문학비가 있다.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은 1941년 12월 12일 이곳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다 다리에 총탄을 맞고 일본으로 압송됐다. 이후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3년6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도쿄제국대 문학부를 졸업한 평양 출신의 소설가 김사량은 1945년 이곳에서 희생된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항일 활동을 기리는 뜻에서 ‘노마만리’를 썼다. 그의 문학비 뒤편엔 “이십구 용사가 서로 엄호해가며 내달려 올라가 진지를 잡았다는데 호가산은 말이 없고, 이끼 앉은 바위 위에는 낙엽만이 쌓여 있었다”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어 일행은 황북평촌(黄北坪村)으로 향했다. 호가장에서 전사한 중국 팔로군과 조선의용대원 박철동·손일봉·최철호·왕현순(본명 이정순) 등 4명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안내를 맡은 왕춘향씨는 “조선의용대원은 일본군에 잡힐 것에 대비해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호가장은 당시 일본군 주둔지역과 몇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숫자가 적어 주로 게릴라작전을 펼쳤던 조선의용군은 일본군이 수색을 나오면 중국인 가옥에 숨곤 했다. 땅속에 물건을 저장해 두는 동굴도 그중 한 곳이었다. 우물처럼 생긴 곳이었다. 한 참가자가 ‘어떻게 이런 곳에 숨느냐’고 묻자 그 집에 살고 있는 70대 노인이 직접 그 밑으로 내려가 시범을 보여 줬다. 동굴 아래로 내려가면 옆으로 트인 동굴로 이어져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둘째 날 방문단은 십자령(十字岭)을 찾았다. 중국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이 연합해 싸운 항일 무장투쟁의 최대 격전지 중 하나다. 당시 일본군은 4만 명을 투입해 대규모 소탕작전을 벌였다. 윤세주·진광화 등 조선의용군이 용감히 싸웠지만 일본군 전투기가 십자령 골짜기를 폭격하면서 장렬히 전사했다. 이들이 사력을 다해 확보한 퇴로를 이용해 퇴각한 중국 팔로군 중에는 덩샤오핑(鄧小平)도 포함돼 있었다. 6·25전쟁 때 중공군을 총지휘했던 펑더화이(彭德懷) 역시 이때 안전하게 대피했다.

마을 담벼락엔 항일구호 아직 남아 있어
셋째 날 일행은 이 지역 조선의용군 최초의 주둔지였던 흥복사(興福寺)를 방문했다. 상무촌이란 마을에 위치한 도교 사찰이었다. 주변 야산에 일본군과 전투 중 사망한 무명 대원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인근 운두저촌(雲頭低村) 마을 어귀의 성문 담벼락엔 조선의용대가 새긴 항일구호가 아직 남아 있었다.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등이었다. 앞 문장은 일본군의 투항을 종용한 것이고, 뒤 문장은 일본군에 징집된 한인들이 부대 안에서 모국어를 쓸 수 있도록 요구하자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마지막 날 방문단은 진기로예열사능원(晋冀鲁豫烈士陵園)에 들렀다. 중국 최초로 세워진 국립묘지다. 놀랍게도 이곳엔 한국인 2명이 안장돼 있었다. 항일운동에 참가했던 윤세주 열사와 진광화 열사다. 한·중 수교 후 선열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방중한 유가족들이 발견했는데 한국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두 열사는 앞서 언급한 십자령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했다. ‘진 열사의 묘가 훨씬 더 큰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현지 안내를 맡은 상영생(尚荣生)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장은 “중국공산당 당원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묘의 크기는 상관없다. 이들의 고귀한 희생은 똑같이 존중받고 있다. 남북이 화합하는 의미로 내년에는 평양에서 가져온 흙과 서울에서 가져온 흙을 합하는 행사를 갖자”고 제안했다.

마지막 일정을 마친 일행은 베이징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이번 여행의 감상을 털어놓았다. 오아름 베이징대 한국유학생 연구생회장은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중국 내 항일운동가들에 대해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말했다. 베이징대 박사 과정에 있는 정원식씨는 “조선의용대의 목숨을 건 항일투쟁 활동이 한국현대사에서 빨갱이들의 항일투쟁쯤으로 폄하되고 있는 게 안타깝다”며 “미래 지향적인 통일 한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역사 복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국민당 정부와의 기나긴 협상을 통해 중국 대륙에서 최초로 합법화된 한국인 무장조직이다. 이후 국공합작 뒤 팔로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해 혁혁한 전과를 거뒀다. 중국 대륙에 한국인들의 항일투쟁 의지를 각인시킨 활약이었다. 조선의용대는 훗날 중국 팔로군에 편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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