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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은 한민족의 발상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몇해전에 중공이 백두산을 저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근일에 도다시 북괴에 대하여 6.25의 참전대가로 백두산부근 2백50평방km의땅을 달라고 하였다는 보도가 있으니 실로 언어도단이라 하지 아니핤수 없는 것이다.
백두산과 남북만주는 본시 우리민족의 발상지로서 우리의 것이요 중국의 것은 아니다. 고대 고구려시대는 말할것도없고 근세의 역사적사실로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후 남북만주에는 고구려의 지배하에있던 여진인이 여러부족으로 나누어 살고있었는데 17새기초에 여진의 여러부족이 통합하여 청을 건설하고 명을 쳐서 북경으로 천도하여 중원을지배하게되자 여진인은 모두 중국본토로 이주하였다.

<청때 힘으로 봉금>
그러므로 남북만주 특히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에는 거의 사람의 형적을 볼수 없었다. 이애 양강 연안에 거주하던 함경도·평안도 사람들이 강을 건너가 혹은 사냥도하고 혹은산삼을 캐고 혹은 주경야귀식으로 농사도 짓는 사람이 많았다. 이것을 본 청국은 백두산을 포함한 압록강·두만강·건너편 일대를 봉금하고 우리나라 사람은 물론,청국인도 이지방에 들어가 살지 못하게 하고, 1712년 즉 숙종38년에는 조선총관 목극등을 봉금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고 더욱 봉금을 엄하게 하였다 이때 목극등은 우리나라 군관 이의복등과 함께 백두산에 올라가 서방을 조사한다음 압록강과 토문강의 분수령에 정계비를세우고 비문에 『동은 토문강에, 서는 압록강으로 경계를 정한다』고명기하였다.
목극등온 분수령 동쪽으로 흐르는 토문강의 원류를 두만강의 원류로 인식하였으나 실은 송화강의 상류인 토문강의 영류요 두만강의 원류는 여기서 백여리나 떨어진 동쪽에있는 것이다. 이비에 의하면 송화강이래 동만일대의 땅이 모두 우리나라 영토가되는것이다.
청국이 정계비를 세운 것은 불분명하여 양국사이에 범월에대한 분쟁이 자주 일어나므로 이것을 방지하기 위암이었으나, 뒷날 이것이 도리어 간도문제와같은 큰분쟁을 일으킬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정계비를 새운위 약1백50년간 청국은 강희건강의 전성시기가 계승되고 금령이 또한 엄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사람은 감히 범월하지못하였다.

<억지 토문강해석>
그러나 1860년께 철종말년에 청국이 열강의 침략을받아 국력이 쇠약하여 금령이 누그러질 뿐만아니라 이때 우리나라에는 기근이 자주 들었으므로 함경도사람이 많이 두만강을 건너가 수백년간 묵었단 영토를 개간하여 수년동안에 용정촌을 비롯한 간도 각지에 많온 촌락이 생기게되었다.이에 청국은 당황하여 l882년 고종19년에 길림장군의 명의로 공약을 우리나라에 보내서 조선인의 쇄환을 요구하는 동시에 간도주민을 강압하였다.
이때 간도주민들이 백두산정계비에 의하여 간도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 하고 정부에 호소하므로 정부에서는 서북경략사 어윤중을보내서 정계비를 조사하게한다음 청국에 대하여 간도의 영토권을주장하고 공동으로 정계비를조사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고종22년(1885)에 감계사 이중하와 청국의 파원 덕옥·현원계가함께 백두산에 올라가 정계비를 조사하였는데 그결과는 우리의 주장과 조금도 틀리는것이 없었다. 그러나 청국은 토문강즉 두만강을 주장하여 의견이 서로 맞서게되었다. 이때 우리나라는 임오군난후 정치 군사 외교등 모든 면에서 직접 청국이 지배를 받고있을때였으나 간도문제만은 조금도 양보하지 아니하고 20여년간 외교전을 전개하였으며, 그러는동안 간도에는 전국각지로부터 더욱많은 사람이 이주하여 한국인이 간도주민의 약8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일 잇속에 넘어가>
그런데 1905년에 을미조약으로 인하어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게되자 간도문제는 일본이 가로맡게 되었다.
일본도 처음에는 간도를 한국영토라고 하고 간도에 통감부파출소까지 설치하여 청국에 대항하였으나 l909연에 청일협약을 체결하여 만주의 다른 이권과 이것을 교환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북통일이되면 반드시 이것을 중국으로부터 돌려받아야할 터인데 지금 도리어 백두산 남쪽의 땅을 달라하니 무슨 억지인지 알수 없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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