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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과 은총의 방랑 러시아의 무모 고발|인간구제의「딜레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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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요즘「파스테르나크」(1890∼1960)의 미완성 희곡이「이탈리아」의「일·드라마」지에 실려 큰 화제가 돼있는 것같다. (「월간중앙」5월호에 전역 소개되었음)이 작품의 제작연대는 1958년께인데 그무렵「파스테르나크」를 방문한「올가·카슬리」에 의하면 그는「고골리」의『죽은혼』과 같은것을 전3부로된 희곡형식으로쓸 작정이었었다.
그러니까「고골리」처럼「러시아」의 운명을 그려 보고자 한것이 곧『눈먼 미녀』다.
제1부제1장의 때는1835년10윌. 막이오르면「삐아띠브라스크」의「노브로체크」백작가에서는 하인들이 여행에서 돌아올 주인부부를 맞을 준비로 바쁘다.

<귀족사회의 타락>
이 백작가는 당시「러시아」귀족사회의 타락상을 잘 반영하고있다. 심한 방탕끝에 생식능력을 잃은 백작,「플라똔」이라는 종과 정을통하고있는「에레나」백작부인, 농노의 반란, 들끓는 도둑떼…. 몰락직잔에놓인 이백작부부는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마지막남은 재원인 보석문제로말다틈을 한다. 이때 백작은 그 방에 와있는「플라똔」을 홧김에 쏘는데 그 순간 「플라똔」을 몸으로 막는 하녀「루샤」가 엉뚱하게도 희생당한다. 백작이 쏜 총알이 빗나가 옷장위의 석고반선상을 깨뜨리는바람에 그 석고 가루가「루샤」의눈에 쓸려들어가 그 눈이머는 것이다. (대충 이렇게 끝나는제1장이 이희곡에서는 제일 완성도가 높다.
구성도 치밀할뿐 아니라 불길한 가운을 암시하는 수수께끼같은 석고상「돔나」백작부인의 가장 무도회옷(악마의 복장) 정체는 알수없으나 매우 암시적인「다른 목소리」등을 통해서 종종고의적이고 몽환적인 순간이 번득인다.)

<농노해방과 함께>
그다음 제2장은 1860년, 그러니까 농노해방 전해에 벌어진다. 그동안「노브로체크」백작은 병사하고「에레나」부인은「이래네이」백작과재혼하여 3남매를 두나 한편 「플라똔」과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얻는데 마침「루샤」가 낙태한 김에 그 아이 (「아가폰」)를 그녀에게 맡겨 기른다.
제2부에서는「루샤」의 아버지「빠꼼」영감이 죽고「알렉상드르·듀마」라는 불란서의 압부겸 작가가「삐아띠브라스크」를방문, 그곳에서 만난사람들과 농노해방 문제등을 논의하지만 이 제2부는 미완성이다.
제3부는 집필조차 되지않았다. 단「올가·카슬리」의 방문기를 보면 이 최종막에서는「파리」에서 배우로 성공한「아가폰」이 귀국하여 어머니「루샤」의 눈을 저명한 서구의사를 대어서 고쳐준다는것이다.『내가이제3부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려 한것은 문명화하고 유복한 중산계급, 그러니까 진보적이고 지적이고 예술적인 서구의 영향에 문호를 개방한 그런 중산계급의 출생이랍니다.』(「문학춘추」1964년7월호참조)

<하녀루샤의 운명>
이 미완성극에서 가장 흥미로운것은 하녀「루샤」다. 이 극의「타이틀」로도 쓰인「눈먼미녀」다. 그녀의운명은 바로「러시아」의 운명이다.
그녀의아름다움은 의모의 미가 아니요, 내면적,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이다. 그녀는 추악한 이기주의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든 자기 희생정신의 화신이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주목해야할 것은 「루샤」의 내면적인 미는 매우「러시아」적이라는사실이다.
가령 제1장에서 주인의환영준비를 서두르는 동안 어떤하인이「풀라똔」얘기를 꺼내자 「풀라똔」을 사모하고있는「루샤」가 얼굴을 붉힌다. 그것을 옆에서 놀려대니까,
루샤『쓸데없는소릴…전 결혼한 몸인데다가 「풀라똔」이 제게 무슨 존재라고 엉뚱한말씀을 하시죠?』
쁘로꼬르=『이상한 눈초리던데』
루샤=『그랬음어때요? 여자란 누구나 다정한동물이 아닐까요?』

<이해떠난 인간형>
너무 간단한 예일지모르나「여자란 누구나 다정한 동물」이란「루샤」의 말속에는 그 전후사정을 고려해볼 때 우리의 합리적상식으로는 얼핏 이해하기힘드는「러시아」인의 복잡한 성격이 융압돼있는것이다. 그건 바로「지바고」가 「라라」에게서 발견한「어떤불함리하고 측량할수없는 것, 어둠침침한 무의식의 요소」라고도 볼수있다.
그연원으로서는「다쨔아나」(「오네긴」)·「나따샤」(「전쟁과평화」)·「그루솅까」(까라마조프의 형제)로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있는 그 특질은 사실상「지바고」에도 깊이 스며 있었던 것으로서 한마디로하여 이해타산을 초월하는 크나큰 포용력·충동적인 여성, 특히 소박한 단순성 같은것들의 복합체다. 그런 아름다움은 인간형이「루샤」다.

<대사도 소박하게>
게다가 이 극에 쓰인 언어도, 가령<굶주린 농노에게는 그녀가 어떻게되든 작년에 내렸던 눈보라도 흥미가 없었다> 든가 <지금쯤「풀라똔」은 숲속에서 새처럼 방황하고 있을 거>라는대목에 보이는 소박한 단순성은「루샤」의 단순성과 은밀히 조응된다.
일찌기「고골리」는『죽은혼』(농노)에서「러시아」를 미지의 곳으로 무모하게 달려가는 성급한「트로이카」에 비유했었다.
단 그런 조국을 그추악한 이면 때문에 거주하면서도 그답게 은근히 찬미 했었다. 그 찬미는 농노제의 죄악을 풍자한 제1부 다음의 반성적인 제2부의 진통을거쳐『신적인 미덕을갖춘 남자』와 참되고 아름다운「신성한 처녀」가 나올 제3부에서 절정에 달할것이었다.
하지만「고골리」는 제2부의 원고는 불살라버렸고 제3부는 끝내 손도 대지 못했다. 그의 개인적양심이나 도덕감만으로는 그 당시의 집단적인 부패와 부정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파스테르나크」역시 속편을 쓰지 못하고 말았다.
그가 꿈꾼『눈먼미녀』의 훗날의 개안은 비단 (이런 추측이 허용된다면) 19세기「러시아」중산층의 서구적인 지성이나 양식의 개발뿐아니라「고골리」가 무섭게 예언한「러시아」의 어제와 오늘의 정치적 경제적 무모성을 깨우쳐주려는데 그숨은 의도가 있었을지모른다.
(그리고 당국의 눈을 속이기위해 무대의 시기를 19세기로 좁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인 뜻에서 인간의 구제는 그저 인간적인 양식이나 척도만으로 가능할까? 그렇다고 이제와서 「단테」나「고골리」처럼 신의 은총에 의탁해야될까? 이런「딜레머」가 이 미완성극의 언저리에 감돌고있다. 물론「파스테르나크」가 이문제를 어떻게 매듭지었을지는 알 길이없지만 그런만큼『눈먼미녀』에 얽힌 문제들, 가령「구원」의 문제는 더욱 우리의관심을 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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