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미국이 북한에 원하는 건 정권교체 아닌 정권변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 한·미 안보 전문가 50여명이 지난달 30일 제주 하얏트 호텔에서 제2차 한·미 안보포럼을 갖고 북핵 문제에 대한 해법을 토론하고 있다. 제주=최원기 기자

한반도가 격랑에 휩싸였다.한.미 관계가 균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고, 북한은 2.10 핵보유 선언을 통해 6자 회담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갔다. 한.일 양국도 독도와 역사왜곡 문제를 둘러싸고 날카롭게 맞서는 형국이다. 우선 북한 핵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한.미 전문가 50여명이 제2차 한.미 안보포럼을 열고 의견을 모았다.세종연구소(소장 백종천)와 한국국제교류재단(이사장 권인혁)이 공동 주최하고 본사가 후원한 안보포럼은 지난달 30일부터 사흘간 제주 하얏트 호텔에서 열렸다. 토론 내용의 핵심을 소개한다.

◆ 김준형(한동대)교수=조지 W 부시 1기 행정부는 지난 4년간'한국 무시하기(Korea Passing)'정책으로 일관해 왔다. 그 밑바닥에는 북한을 보는 서울과 워싱턴 간의 눈높이 차이가 있다. 주한미군 재배치 등을 둘러싸고 미국의 일방주의 같은 외교 관리상의 실책도 있었다. 재선에 성공한 부시 2기 행정부는'한국 쥐어짜기(Korea Taxing)'에 주력할 것 같다. 미국은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면 워싱턴은 이제 팔을 걷어붙이고 좀더 적극적으로 나와야 한다. 핵문제에 보다 높은 우선 순위를 부여하는 한편 한국에도 더 많은 자율성을 줘야 한다. 행정부에 한국통을 보다 많이 기용하는 일도 필요하다.

◆ 테드 오시우스(국무부 한국과)부과장=미국은 한국을 결코 소홀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한국은 이라크에 세번째로 많은 군대를 파병한 국가다. 한국은 영국.일본 못지않게 미국의 소중한 동맹국이다. 최근 크리스토퍼 힐 전 주한 대사가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로 승진했다. 미국이 한국을 중시한다는 의미다. 한국은 미국의 7대 교역 파트너 가운데 하나다. 양국 간에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된다면 양국관계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한국민의 반미감정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국무부는 1988년부터 2004년까지 한국민의 대미 인식을 조사했는데 사안별로 그때그때 달랐다. 내가 보기에 이는 반미감정이 아니라 북한과 핵문제 등 당시 상황 변화에 따른 국민감정의 발로로 보였다.

◆ 존 메릴(국무부 정보조사국)팀장=해명할 것이 있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이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EU)과 관련된 허위 정보를 한국에 흘렸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미국은 동맹국에만 정보를 제공한다. 만일 동맹국에 허위 정보를 제공하다 그것이 발각되면 동맹 간에 신뢰가 무너진다. 이건 무서운 일이다. 또 미국은 북한의 정권교체를 추진하고 있지 않다. 다만 정권변화를 추진할 뿐이다.이는 북한이 리비아처럼 정상 국가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최근 북한을'주권국가'라고 표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얘기다. 북한 전문가로서 관심을 갖는 분야는 북한의 경제.사회적 변화다. 2002년 7월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북한 사회에 승자와 패자가 나타나는 등 흥미로운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 셀리그 해리슨(국제정책센터)선임연구원=북한 핵문제의 해결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미국이다. 부시 행정부는 핵문제 해결을 위해 북.미 관계를 개선할 의지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부시 2기의 핵심 인사인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로버트 조셉 국무부 차관,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잭 크로치 보좌관, 빅터 차같은 인사들은 북한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갖고 있다. 이들은 평양을 정권교체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들이 북한에 대해 '동시행동 조치'가 아니라'선(先)핵포기 후(後)관계개선'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한 핵문제가 풀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 핵개발에 대한 미국의 정보도 과장됐을 공산이 크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2002년 북한의 우라늄 농축이 5~6년 후에 완성될 수 있을 것으로 평가했다.그 뒤로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북한이 농축 시설을 완공했다는 정보는 아직 없다. 이란 핵문제 해법을 마련한 유럽연합 모델을 본받아 동북아 국가들이 6자회담을 '미국을 배제한 4자회담'으로 개편하는 방안도 검토해봄 직하다.

최원기 기자

*** 닉시 미의회조사연구원 "북한 목표는 동북아의 파키스탄"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한.미 관계가 80점이라면 지금은 잘해야 60점밖에 안된다."

제2차 한.미 안보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미의회조사연구소(CRS)의 래리 닉시(사진) 선임연구원은 간신히 낙제점을 면한 상태라고 한.미 관계를 평가했다. 경제 관계는 좋지만,북한 핵 문제를 둘러싸고 부시 행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삐걱대고 있다는 지적이다.

워싱턴의 중도 우파적 시각을 대변해온 닉시 박사는 한.미 관계가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데는 워싱턴과 서울 모두에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우선 부시 행정부는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한 구체적인 정책은 내놓지 않고'악의 축''폭정의 전초기지'같은 정치적 수사만 남발했다고 그는 비판했다. 정치적 슬로건은 처음에는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부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과만 낳는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노무현 정부의 실수도 그는 매섭게 비판했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핵은 외부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억제 수단이라는 북한 측 주장은 일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발언이 6자회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 한.미 동맹을 해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이 미국에게 할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다만 건설적인 충고와 불필요한 비난은 가려서 해달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원활한 한.미 관계를 위해 그는 ▶워싱턴은 구체적 정책 개발에 주력하고▶북한에 대해 한.미 양국이 목소리를 내야 하며▶북한에 대한 공개적 발언은 신중해야 한다는 세 가지 처방전을 내놨다. 그는 또 한.미 양국이 최근 불거진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가 1999~2001 기간 중 북한에 건네준 11억 달러가 북한의 핵개발 비용으로 전용됐다"는 보고서를 발표한 적이 있다.

6자회담의 전망에 대해 닉시 박사는 회의적이다. 북한의 목표는 ▶한.미 관계의 이간▶핵 보유 두 가지이기 때문에 설사 6자회담이 재개되더라도'회담을 위한 회담'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북한의 진짜 목표는 비밀 핵개발을 통해'동북아의 파키스탄'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임동원 세종연구소 이사장 "북 핵보유 선언은 협상용 카드"

'햇볕 정책의 설계자'인 임동원(71) 세종연구소 이사장은 북한의 2.10 핵 보유 선언을 '협상용 카드'라고 평가절하했다. 한마디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 앞에서 북한의 핵무기는 결코'억지력'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는 "북한의 핵개발은 고립을 자초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임 이사장은 평양이 6자회담의 장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1993~1994년 1차 핵 위기 당시 이뤄졌던 북.미 양자회담보다 6자회담이 북한에 유리하다는 것이다.이유는 이렇다.

"북.미 양자회담은 정권이 바뀌면 끝이다.예컨대 클린턴의 대북 약속은 부시 행정부에서는 휴지조각이 됐다. 반면 6자회담은 나머지 5개국이 '보증인'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라고 임 이사장은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미국이 지난해 6월 제시한 다자안전보장 방안을 북한이 깊이 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그는 미국도 "핵 폐기와 대북 적대 정책을 맞바꾸자"는 평양의 일괄타결안을 진지하게 시험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김정일 정권 교체 같은 강경책은 문제만 더욱 꼬이게 한다는 지적이다.

현안인 대북 비료 지원에 대해서도 그는'선(先) 대화, 후(後) 지원'입장을 밝혔다.인도적 차원에서 북한에 20~30만t 가량의 비료를 제공하되, 남북 대화 등 북한의 공식 요청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이와 관련, 임 이사장은 "북한이 4월 중에는 대화 테이블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이뤄진 남북 관계에 대해 그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1만여 명의 이산가족이 이미 만났고,오가는 사람들이 8만여 명에 이르는 등 남북 교류가 이제 '일상 관계'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통일이 10~20% 정도 이뤄진 셈"이라고 자평했다.

햇볕정책이 민족의 가치를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한.미 동맹을 소홀하게 만든 것 아니냐는 질문에 임 이사장은 "민족 때문에 동맹이 있는 것이지, 동맹 때문에 민족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김대중 정부 시절 대북 정책을 총괄했던 임동원씨는 지난해 11월 현직에 취임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