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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 신문의 육성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대필한 연서는 아무리 명문이라도 체온이 없다. 거기엔 불꽃뛰는 자기의 호흡이 없기때문이다.
「뉴스」의 행방불명시대- 이는 오늘의 신문을 두고 말하는 것같다. 사회적으로 의미짙은 「뉴스]가 소리없이 사라져가는 인상은 너무도 선명해졌다.
한때는 「비판」을 「부정적」인 것으로 비약해서 해석한 층도 있었다. 요새와서는 「비판」을 「저항적」인 것으로 해석을 슬쩍 바꿨다. 「부정적」이랄 때보다는 약간 에누리를 붙인 셈이다.
이런 앵무새파들이 제아무리 재치와 잔꾀를 가지고 언어의 유희를 꾀해보아도 「비닐」조화가 생화로 바뀔 수는 없다.
비판- 그것없이 사회의 건강은 지탱되지 못한다. 무비판, 편견, 일변도 이런 것들이 얼마나 지난날에 많은 오류를 가져오게 했던가를 생각해보아야 할것같다.
「예스·맨」의 신문을 믿거나, 비판하는 신문을 믿거나 그건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자유다. 그러나 비판하는 신문을 사생아 다루듯 하는건 반공익적인 것이며 사회의 손실인 것이다.
비판은 뒤로 미루고 비판의 바탕이 될수 있는 사실의 표현마저 뭉개버리는 일은 뭣을 뜻하는 것일까. 아예 발붙일 곳을 없이하는것이나 다름없다. 말하자면 백성들은 사실의 제목조차도 구경못하게 된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문엔 나오지않은 「뉴스]가 시민의 입으로 알려져, 소리없는 소리로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신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무리 겉치레와 포장시대라고는 하지만, 신문상품의 종국적 집약가치는 활자의 의미에 있다.
비단속에 묻힌 화려한 백만자보다 마분지위에 옮겨졌을지언정 거짓없는 몇마디의 글이 더 소중한 법이다.
거칠어도 좋다. 세련되지않아도 무방하다. 아름답지않아도 괜찮다. 모양이 덜좋아도 상관없다. 문제는 그런것들이 아니다. 자기의 본래 목소리를 내야한다. 신문의 자주-. 그것은 무게있고 정직한, 신문의 육성을 되찾는데서부터 시작해야된다. 오소백(신문논리위 제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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