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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때 인구 100만 천년고도 시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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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올랐던 시안성 누각. 시중쉰 전 부총리가 철거를 막았다(사진 위). 시안시 곳곳에 설치된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건설을 환영하는 입간판. ‘삼성과 당신이 함께 약속하는 매력 시안’이라고 적혀 있다.

시안(西安)의 과거는 화려하다. 시안은 남북 150㎞ 동서 300㎞의 분지인 관중(關中) 평원의 중심이다. 주(周)나라부터 당나라까지 “관중을 차지한 자가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는 말이 통용됐다. 한(漢)나라 때 관중의 인구는 전 중국의 10분의 3이었지만, 생산한 부(富)는 10분의 6에 달했다. 유방(劉邦)과 항우(項羽), 삼국지의 영웅들이 시안을 차지하기 위해 결전을 치른 이유다.

 세계제국 당의 장안(長安)은 거대했다. ‘오래도록 편안하다’는 뜻의 장안은 ‘영원한 도시’를 의미한다. 남북 8.6㎞, 동서 9.7㎞인 장안성은 84㎢ 면적으로 서울 여의도의 열 배다. 당대 장안성은 현존하는 길이 13.71㎞의 명나라 성곽 넓이의 9.7배, 원(元)·명(明)·청(淸)의 수도 베이징성의 1.4배에 달했다. 세계 최대 규모였다. 447년 건축된 비잔티움의 7배, 800년 건축된 바그다드의 6.2배였다.

 장안의 중축선은 주작대로였다. 황성(皇城)의 남문인 주작문(朱雀門)에서 외곽성의 남문인 명덕문(明德門)을 잇는 폭 155m, 길이 5020m의 길이다. 서울에서 가장 넓은 세종로의 폭이 광화문광장이 조성되기 전 16차선 50m였던 것에 비하면 규모의 거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1300여 년 전 50차선 폭의 도로가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인파를 맞이했다. 황제는 이들을 당률(唐律)로 통제했다. 성 안에 각각 동서 550~1125m, 남북 500~838m에 3m 높이의 담장으로 조성된 110개의 방(坊)을 만들어 주민을 수용했다. 밤새 호희(胡姬·서역 여인)들이 유혹하는 주점의 영업은 지정된 방 안에서만 이뤄졌다. 해가 지면 주민들은 방 밖으로의 통행이 금지됐다. 우주의 축소판인 장안성은 황제의 규칙에 따라 통제됐다.

 ‘서양에 로마가 있다면, 동양에는 장안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장안은 아시아 제국의 수도다웠다. 7~10세기 세계의 모든 길은 장안을 향했다. 당시 100만 인구의 장안은 역사상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자랑했다. 다양한 종교 교리, 시(詩) 형식, 첨단의 법과 정치 제도, 새로운 복식과 헤어 스타일이 넘실댔다. 20세기가 아메리칸 드림의 시대였다면 당시는 ‘당나라의 꿈(Tang Dream)’의 시대였다. 한반도와 일본의 유학생과 구법승, 돌궐·위구르의 무사, 인도·페르시아·아랍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장안은 각종 문화가 모여 고이는 ‘저수지’이기도 했다. 부유·자유·관용·낭만이 가득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외치는 ‘중국의 꿈(中國夢)’의 뿌리가 바로 성당(盛唐)의 재현이다.

 고구려·신라·백제 삼국 통일도 장안에서 주춧돌이 놓였다. 서기 648년 말 신라 사절 김춘추(金春秋·604~661)가 당 태종(太宗)과 가진 단독 회견에서다. 그는 당 태종과 통일을 논의했다. 김춘추는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650년 4월 장남 김법민(金法敏·훗날의 문무왕)을 장안에 보내 진덕여왕이 비단에 수놓은 ‘태평송(太平頌)’을 선물했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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