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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반세기에 펼치는 특집 시리즈(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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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유사이래 처음으로 간악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그 압제에 신음하다가 10년째 되는 해에 일으킨 거족적 독립운동이었다. 그런데 이 민족독립운동의 주동 세력을 이루고 그것을 거족적인 민중운동으로 발전하게 한 것은 천도교·기독교·불교와 같은 종교 단체들이었다. 그러한 사실은 3·l 운동 때에 선포된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이 천도교인 15명, 기독교인 16명, 불교인 2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만을 가지고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3·1운동을 옳게 이해하려면 먼저 상기한 종교들이 그 때에 있어서 어떠한 상태 하에 있었던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민중 속에 뿌리박고>
일제는 우리 국권을 강탈한 후 이른바 사찰령·포교령·교육령·회사령과 같은 우리나라에서만 효력을 갖는 각종의 금령을 공포하여, 우리의 종교 단체와, 교육기관과 사회 단체를 탄압하는 한편 관·공립학교의 교원들까지도 군복과 대검으로 무장시켜 위세를 보임으로써 철저한 무단 정치를 시행하였다. 따라서 우리 외교권·경찰권을 박탈한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진 1905년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수천의 우리 사설 교육기관과 여러 사회 단체는 거의 폐쇄 또는 해산되고 일제의 허가를 받은 것들만이 겨우 남아있게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우리 민족 말살 정치 하에서도 다행히 살아 남아 있을 수 있는 단체는 오랜 전통과 굳센 조직을 지니고 민족대중 속에 깊이 뿌리를 대리고 있던 종교단체들과 이들이 경영하는 교육기관들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종교단체에 대하여서도 온갖 탄압을 가하고 그들의 일본화를 꾀하였으나 원래 우리 민족정신의 바탕을 이루고 있던 이들 단체가 그렇게될 수는 없었다.

<「이신환천」 내세워>
그러한 종교 단체로서 3·l운동의 주동 세력을 이루게 된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천도교·기독교·불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세 종교 단체가 그 때에 있어서 얼마만한 교세를 지니고 있었나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유·불·선 3교의 줄거리를 모으고 서학(천주교)을 본떠서 만들어진 동학의 제3세 교주이던 손병희가 1906년에 세운 천도교는 순수한 민족주의의 종교 단체로서 국내에 37의 대교구와 1백85의 교구를 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애국동포가 많이 이주한 만주에도 9교구를 두고 있었다. 3·1운동 때의 신도수는 천도교 측에서는 3백만명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1백만명 정도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주이던 손병희는 재정난을 무릅쓰고 앞날의 큰일을 위하여 보성사라는 인쇄소를 경영하고 초등·중등·전문정도의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경영하며 천도교청년회·소년회를 조직하여 국내외에 걸쳐 백여의 지부를 두고 있었다.
그는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해인 1919년1월초부터 2월말에 걸쳐 전국 주요 9대교구에서 49일간의 연성기도회를 개최하고 『몸으로써 하늘을 바꾸게 한다』(이신환천)라는 「슬로건」아래 백만 신도들에게 앞으로 합일의 마음씨를 다짐한 일이 있었다.

<정의와 사랑의 복음>
박애 평등주의를 근본교지로 한 각파의 그리스도교 가운데에서 3·1운동의 주축 세력을 이루게 된 것은 장로교 감리교와 같은 프로테스턴트파였다. 이 프로테스턴트파는 미국 북장로파의 의사목사이던 「앨런」이 1884연에 들어와 활동함으로써 차차 퍼지게 되었다. 그는 그해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부상한 사대당 두목이던 민영익의 상처를 치료하여 줌으로써 우리 왕실로부터 교육 및 의료 사업을 일으킬 특권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프로테스턴트의 각 파에서는 이러한 사업에 힘을 기울여 이 나라를 근대화하는 일에 무게 이바지하는 한편 정의와 사랑의 복음을 펴게 되었다. 그 결과 35년을 지난 3·1운동 때까지 교회는 15의 교파에서 2천수백의 교회를 세우고 22만명의 신도를 거느리는 한편 네곳의 전문학교와 41곳의 고등보통학교와 6백여의 보통학교를 경영하고 있었고 서울의 중앙기독교청년회를 비롯하여 평양·의천·함흥·대구 등지에도 기독교청년회를 두고 있었다. 특히 서울의 중앙기독교청년회는 1903연에 설치되어 웅대한 회관을 건립하고 신자로써 구성된 3백여명의 정회원과 비신자로써 구성된 l천수백여명의 준회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유림들도 적극 호응>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천여년 동안 우리나라의 국교로 되어있던 불교는 이씨 왕조의 숭유억불정책으로 말미암아 쇠태의 길을 밟게 되었으나 그래도 3·1운동 때까지에는 전국에 걸쳐 30본산과 l천3백여 사찰과 7천6백여의 승려와 15만여의 신도를 가지고 있었다. 불교의 교육기관으로는 서울의 중앙학림(고등부)을 비롯하여 주요 본산에 설치한 10곳의 지방학림(중등부)에서 승려를 주로 양성하고 있었고 주요 본산에서 경영하는 11곳의 보통학교가 있었으며 서울·평양·함흥 등지에는 불교청년회에서 경영하는 야학회 강습소가 있었다.
상기한 세 종교 단체 이외에도 3·l운동에 적극 호응한 단체로는 천주교·대종교·유림이 있었으나 이들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주력 세력에는 들지를 못하였었다. 오랜 박해로 시달리던 천주교는 8만여의 신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 주재자가 외국인인 불인이었기 때문에 소외되었었고 대종교와 유림은 이렇다 할 만한 굳센 조직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선봉은 청년 엘리트>
3·1운동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종교 단체가 주동하여 일으킨 거족적 민족 운동이었다. 종교인들은 『너희는 먼저 그 의를 구하고, 그 나라를 구하라』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정의를 위하여 구국운동을 일은 키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굳센 단결력으로 가능하였었다.
그들은 온갖 정의와 인도를 짓밟고 있던 일제의 탄압 정책에 의분을 느끼고 나라를 도로 찾아야 하겠다는 애국심을 신앙화하여 물 샐 틈 없는 조직 하에 마침내 3·1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은 정의감에 불타고 혈기가 충일한 청년「엘리트」들의 선동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3·1운동의 선봉은 1919년2월8일 하오2시 동경 조선기독교회관에서 우리 유학생 6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가 낭독 발포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독립선언서」는 상해·북경을 거쳐 서울로 들어와 국내외 민족 운동자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동경으로 돌아갔던 기독교인 이광수가 지은 것이었다.

<3대 기간 노선 따라>
그리고 이 독립선언서의 발표식을 사회한 윤창석은 그리스도교식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그 식을 끝마치고 독립 만세를 제창하게 하였었으니 여기에도 그 장소와 더불어 종교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앞서 천도교의 중진이던 권동진은·오세창·최린 3인은 미국 대통령「윌슨」의 강화 안에 자재를 받아 1918년 12월 하순부터 민족자결 방법을 밀의한 끝에 국권반환 청구서를 일본 정부·의회·조선 총독부에 보냄과 아울러 그 원조를 미국 대통령 및 「파리」 강화 회의에 요청하기로 하고 이 일을 천도교 단독으로 할 수 없다고 보고 외국과의 교섭상 기독교와 협력하기로 하여 이듬해 1월 중순에는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의 3대 기간 노선을 세우고 교주 손병희의 쾌락을 얻었다.
한편 동경에 유학하다가 학비 난으로 중퇴한 불교의 한용운은 최린을 만나 민족운동을 일으킬 뜻을 밝힌 일이 있었다.
이러한 무렵에 이씨왕조의 마지막 둘째 임금으로서 1907년에 일제의 강요로 황제위를 물러난 고종이 그 아들 영친왕의 일본인과의 결혼을 반대하다가 일본인 시녀가 독약을 섞어 올린 약을 마시고 1919년1월21일에 갑자기 승하하게 되니 일제에 대한 우리민족의 분노는 충천하고 있었다.

<고종 독살에 큰 분노>
말하자면 이 고종 독사 사건은 이미 종교인들 사이에 피하고 있던 우리민족 운동을 촉진시켜 전 민족 운동으로 대중화하게 한 기틀이 되었었다.
그리하여 그해 2월5일에는 최린이 최남선·송진우·현상윤과 모의하여 천도교·기독교·불교가 손을 잡고 구 한국 고관들까지도 끌어넣어 민족 운동을 일으키기로 작정하고 구체적으로 대표자를 선정하여 접촉하였으나 유림 출신의 구 한국 고관들의 태도가 확연치 않았으므로 오직 종교계와 학생계와 주동하여 일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평북 정주 오산학교 출신인 김도태를 그 모교에 보내어 장로교파의 거두인 이승훈을 2월11일 서울에 오게 한 후 송진우·김성수·신익희와 만나 『기독교인의 소망은 조국의 독립이다』라고 말하고 각파 영신들을 참가토록 할 것을 확약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서북지방 동지들의 찬성을 얻은 이승훈은 2월17일 다시 상경하여 같은 목적을 위하여 청년학생단을 결성 지휘하고 있던 중앙기독교 청년회 간부 박희도를 비롯하여 감리교의 정춘수 오화영 오기선 신홍식 이갑성 함태영 안세환 오상근 현순과 민족운동 방법을 협의한 끝에 천도교와 손을 잡고 소년 학생들과 더불어 일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24일에 그 뜻을 천도교의 최린에게 알렸다.

<인도·평화와 자유>
한편 최린은 2월10일에 불교측 대표 한용운·백용성의 찬성을 얻은 바가 있었으므로 이에 이르러 새 종교단체의 대표로써 민족대표 33인을 구성하는 일은 끝마치게 되었다. 이때 민족대표를 33인으로 국한하게 된 것은 기밀의 고전 누설을 막자는 데도 이유가 있었으나 33이라는 숫자가 인간계의 상위에 있다는 무한대한 우주 전체를 뜻하는 33천이라는 불교의 천문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뜻에서 이씨 왕조 시대에는 대과 과거시에 33명을 합격시키고 날마다 새벽에 서울성곽 사대문 서소문을 열 때에는 파루종을 33번씩 올린 일이 있었는데 이러한 점에서도 볼 수 있다.
이리하여 이름을 불교 신도인 최남선이 지은 독립선언서에 각각 서명 날인하게 하고 이들 천도교의 보성사에서 2월27일에 2만l천장이나 인쇄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 선언서를 곧 주로 종교계의 청년 및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국내외의 목적지로 떠나게 하고 서울에서는 28일밤에 정동예배당과 승동예배당(인사동)에 모인 중등 이상의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다음날인 3월1일에 각각 맡은 구역 내에 뿌리게 함으로써 마침내 거족적인 비폭력의 항일 민중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3·1운동 때에 선포된 독립선언서에는 이미 말한바와 같이 동경 유학생의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청년독립단에서 발표한 2·8선언서와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선포한 3·1독립선언서의 두 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 두가지 독립선언서에는 모두·정의·인도·자유·평화를 주장하는 종교성이 나타나 있다.
2·8선언서의 집필자는 이광수였다. 1892년에 평북 정주에서 출생하여 오산학교와 흥사단을 만든 안창호의 감화를 받아 기독교(장로교)를 믿고 민족주의·인도주의를 토대로 한 민족갱생주의사상의 소유자였다. 그는 일본 조도전대학 재학 중이던 27세 때에 2·8선언서를 지었다. 3·1선언자의 집필자는 최남선이었다.

<30세 미만의 집필자>
이와 같이 두가지 선언서의 집필자가 모두 30세 미만의 젊은 엘리트였고 서로 뜻을 같이할 문학인이었으며 종교인이었으므로 그들이 지은 선언관에는 다음과 같이 종교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2·8선언서의 첫머리에서는「전조선청년독립회는 이천만 조선 민족을 대표하야 정의와 자유와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의 전에 독립을 기성할 것을 선언한다」라고 기술하고 그 끝에 가서는 「정의와 자유와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의 상에 선진국의 범을 취하여 신국가를 건설하면 건국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오족은 필히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와에 중헌함이 있으리라」라고 맺고 있다.
다시 그 결의문에서는 「본국은 일한 병합은 오족의 자유 의사로서 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족의 생존과 발전과를 협위하여 동양의 평화를 요란하는 원인이 되는 이유에 의하여 독립을 주장한다」라고 절규하고 있다.
3·1독립선언서의 첫머리에서는 「오등은 현에 아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복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느라」라고 기술하고 그 끝에는 다음과 같은 공약삼장을 열거하고 있다.
일, 금일 오인의 차거는 정의·인도·생존·존영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정하지 말라.
일,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일, 일절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야 오인의 주장과 태도로 하야금 어데까지던지 광명정대하게 하라.
그러고 3·1선언서의 중간에서는「병자수호 조규 이래, 시시종종의 금석맹약을 식하았다하야 일본의 무신을 죄하려 안이 하노라」라고 기술하여 그때까지 일본이 우리에게 범한 죄를 탓하지 않는 다는 관용·자책의 대승적 윤리를 보이고 있다.

<관용·자책의 윤리관>
이렇듯이 두가지 독립선언문에서는 인간의 기본권인 생존·자유·평등·정의·인도·관용·평화에 입각한 인류 공동체로서의 민족의 독립을 일본 및 세계 만방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3·1운동은 인류의 공존을 위한 일종의 민권운동이었으며 일종의 비폭력의 종교적 민족주의 운동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3·1운동은 천도교의 민족주의 사상과 기독교의 박애민주주의 사상과 불교의 자비 사상이 융합되어 이루어진 세계 평화를 위한 독립운동이었다. 이러한 3·1운동의 정신은 제2차대전 이후 실현을 보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50년전에 이루어진 3·1운동은 세계사적으로 보아 지대한 의의를 지닌 인류의 평화를 위한 민족운동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1운동은 확실히 물질문화보다 고도로 발달했던 우리의 정신문화를 온 세계에 과시한 운동이었다. 오늘의 우리나라 종교인들도 모름지기 3·1운동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민권옹호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조국의 발전과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함이 있어야 하겠다. 그 뿐더러 3·1운동때에 선포된 두가지의 독립선언서는 마땅히 우리 청소년들의 정신적 교육의 자료로도 쓰여져야 할 것이다.

<3·l운동 50돌 기념 심포지엄>
2월13일 본사회의실(무순)
사회 유홍렬<성대교수·국사>
윤형중<천주교 서울대교구·신부>
김기석<건대교수·철학>
민태식<성대교수·유학>
이우영<천도교감찰원장>
이기영<동대교수·불교>
정하은<한국신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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