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드릭 클래피쉬 감독의 새영화 '스페인 자취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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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인 자비에(로맹 듀리스)는 에라스무스라는 교환 학생 제도를 이용해 1년간 스페인에서 경제학과 스페인어를 배우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정부 부처에서 일하는 아버지 친구가 학업을 마치면 한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한터라 못할 이유도 없다. 낯선 스페인에서 첫 번째 일은 거처를 마련하는 일, 어렵사리 수소문한 끝에 바르셀로나 시내 중심가에 여러 학생들이 아파트를 나눠쓰는 방을 얻게 된다. 자비에의 룸메이트들은 유럽 각국에서 자신과 같이 교환 학생으로 온 학생들이다.

유럽에는 에라스무스라는 교환 학생 제도가 있어, 유럽 연합의 각국 학생들이 비교적 손쉽게 다른 나라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세드릭 클래피쉬 감독의 새영화 '스페인 자취방(L'auberge espanole)'은 이 제도를 소재로, 한 프랑스 학생이 스페인으로 가서 공부하는 동안 유럽 여러 나라 학생들과 함께 부대끼며 보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유럽 연합이라는 정치적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하지만 이 영화에 한발짝 접근해 보면 머리 아픈 정치적 문제 따위는 찾아 볼 수 없다. 유럽 7개국에서 온 학생들로 이루어진 자취방에도 심각한 갈등 상황보다는 감독의 "가벼운" 의도가 하나하나 눈에 뛴다. 남녀 비율도 비슷하게 구성하고, 현대성의 상징이라는 동성애도 첨가한다. 최근 유럽 사회의 최대 이슈인 극우주의도 영국 학생의 나찌 흉내로 묘사되어(물론, 독일 학생의 심기를 건드리지만) 웃음거리의 소재일 뿐이다.

아마 세드릭 클래피쉬 감독만큼 들쑥날쑥하는 감독도 없을 것이다. 연극적 요소가 강했던 '가족 분위기(Un air de famille, 1996)'로 평단과 흥행에도 상당한 성공을 거둔 반면, '아마도(Peut-etre, 1999)'라는 형편없는 SF 영화로 몰매를 맞기도 했다. '스페인 자취방'은 감독이 직접 밝혔듯이 어떤 의미에서는 "습작 소설과도 같은 습작 영화"이다. 당연히 다양한 정체성이 존재하는 유럽 사회는 감독의 입장으로서는 좋은 영화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같이 좋은 영화 소재라는 점을 뒤집어 본다면 진부한 영화로 빠질 수 있는 문제점을 안고 있고, 감독은 이런 어려움을 느슨한 시각에서 약간은 가벼운 느낌으로 처리했다. 그래서 처절한 문제 의식에 골머리를 싸지 않고 웃어 넘길 수 있는 그런 영화를 만들었다.

주인공이 스페인에서 머문 일 년이라는 기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파리에 남겨두고 온 여자 친구와 헤어지는 아픔도 겪었고, 유부녀와의 격렬한 사랑도 있었다. 바르셀로나의 모든 추억을 뒤로 묻어두고 파리에 돌아와 약속된 자리를 얻게 되지만 스스로 박차고 나와 소설가의 길을 택해, 결국 휴머니즘을 제창하여 보다 인간적 학예를 주창했던 에라스무스의 삶을 직접 살고자 한다.

감독 세드릭 클래피쉬과 주인공 로맹 듀리스는 '위험한 청춘(Le peril jeune, 1994)'으로 시작하여 감독에게 베를린에서 FIPRESCI상을 안겨줬던 '각자의 고양이를 찾아서(Chacun cherche son chat), 1996)'를 거쳐 오늘까지 왔다.

박정열 명예기자 jungyeul.park@linguist.jussieu.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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