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盧·부시 회담은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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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특사단의 방문은 한.미 관계에 대한 워싱턴의 걱정을 줄이지 못했다. 두 나라 정부의 주파수가 확실히 다르다. 이런 상태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워싱턴의 어느 미국 기자가 지난 10일 e-메일로 보내온 의견이다.

'당분간'은 언제까지를 의미하는가. 그리고 노무현 당선자가 미국을 안심시킬 목적으로 보낸 특사단 활동의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가.

'당분간'이란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고 노무현 대통령이 3월에서 5월 사이에 워싱턴에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첫 대면을 할 때까지의 시기를 의미할 것이다.

*** 訪美 특사활동 문제 있었다

서울과 워싱턴은 지금 북한 핵문제와 한국 사회에 흐르는 반미정서에서 비롯된 상호불신과 갈등을 씻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97년 김대중 당선자가 김영삼 대통령을 제치고 외환위기 해결에 나섰던 것처럼 이번에는 노무현 당선자가 김대중 대통령을 사이드라인으로 밀어내고 한.미 관계 봉합에 적극 나섰다.

한.미 관계는 70년대 말 카터정부가 인권과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박정희 정권을 압박할 때 이래 최악의 상태에 빠져 있다.

金대통령에게 부시는 남북화해와 북.미 관계 정상화의 다된 밥에 재를 뿌린 사람이고, 부시에게 金대통령은 클린턴과 함께 김정일의 술수에 '멍청하게' 넘어가 무너질 북한정권을 퍼주기로 지탱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미 관계 회복의 부담은 노무현 당선자한테 넘어갔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노무현 당선자는 늑대 피한 사냥꾼 앞에 나타난 호랑이 같은 존재다.

김대중 정부와의 갈등의 원인은 북한문제 하나였지만 노무현 정부와의 문제는 북한 플러스(+) 한.미 평등한 관계의 요구다.

대통령선거 기간 중 노무현 후보의 미국에 관한 발언들은 그가 대통령이 되면 한.미 관계는 기본틀부터 흔들린다는 태풍경보 같이 들렸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 노무현 당선자는 미국에 대한 강성 이미지 줄이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부시 정부도 기대를 갖고 노무현.부시 정상회담을 기다리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대등한 한.미 관계에 대한 노무현 당선자의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의지가 특사들의 언행을 구속했다. 그들은 워싱턴에서 할 말은 한다, 당당하게 말한다, 따끔하게 말해준다는 의기(意氣)로 일관했다.

애국적 파토스(Pathos)에 집착한 그들은 북한과 한.미 관계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로고스(Logos)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은 통일된 의견을 갖지 못하고 만나는 미국인들에게 저마다 다른 목소리를 내어 미국인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북한의 붕괴보다는 핵무장이 더 낫다는 몰상식한 발언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을 것이다. 특사로 다녀온 사람들은 그런 말 하지 않았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부인한다. 그런 뜻이 아닌 말을 그런 뜻으로 들리게 말했다면 특사단은 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구성됐다는 것인가.

*** DJ-부시 회담 실패 교훈 삼아야

한.미 동맹은 올해로 50년이다. 그동안 흐른 세월, 국제사회가 겪은 변화를 생각하면 한.미 관계는 변화가 늦었다.

남북 분단.대치라는 특수사정이 있었고 61년에서 87년까지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같은 군인들이 정통성 없는 정권을 유지하면서 미국에 저자세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난 반세기의 격동도 한.미 관계를 비켜갔다.

이회창 후보가 당선됐다면 한.미 관계는 적어도 5년 더 현상에 안주할 것이다. 그런 전망 때문에 부시 정부는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기대했다.

노무현의 당선은 당연히 한.미 관계에도 새로운 이정표를 세울 것으로 기대된다. 한.미 관계의 조정에는 주한미군의 역할을 재검토하는 것도 포함된다.

한.미 관계의 변화는 남북 관계의 진전과 보조를 맞춰야 한다. 북한문제를 푸는 방법에 입장을 모으면서 핵문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관계를 찾아야 한다.

정상회담도 서두르지 말고 충분한 준비를 하면서 늦추는 것이 좋다. 2001년 3월 김대중.부시 회담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