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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공습 … 프랑스, 문화 지키기 안간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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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7일(현지시간)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가 열린 북아일랜드 에니스킬린의 로크에른 골프리조트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운데)가 테이블에 앉아 미·EU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참석자는 캐머런부터 시계 방향으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엔리코 레타 이탈리아 총리, 엔다 케니 아일랜드 총리,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에니스킬린 AP=뉴시스]

지난해 프랑스에서 가장 ‘대박 난’ 영화는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007’ 시리즈인 ‘스카이폴’이었다. 690만 명의 관객이 들었다. 그 다음은 미국 애니메이션 영화 ‘아이스 에이지 4’로 650만 장의 표가 팔렸다. 인기작 10편 중 프랑스 영화는 ‘쉬르 라 피스트 뒤 마르수필라미(마르수필라미를 쫓아서)’를 비롯해 3편. 나머지는 모두 미국 영화였다. 올해도 최대 흥행 순위 1, 2위는 ‘아이언맨 3’와 ‘장고:분노의 추적자’로 모두 할리우드 영화다.

 프랑스의 복합상영관에서 젊은이들은 대형 스크린을 장악한 미국 영화로 몰린다. 자국 영화가 최고라고 믿는 프랑스인들은 개탄을 금치 못하지만 당랑거철(螳螂拒轍·수레를 막겠다고 나선 사마귀)처럼 처량한 신세다. 극장 수입의 11%를 정부가 떼어내 자국 영화 제작 지원금으로 쓰고 있지만 대세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대중가요도 마찬가지다. 청·장년층에선 샹송을 ‘옛 노래’라는 별도의 장르로 여긴다. 한국에서의 트로트와 유사한 취급을 받는다. 대신 미국의 영향을 받은 프렌치팝은 말할 것도 없고 랩·힙합 등이 샹송을 대체한 지 오래다. 샹송보다는 K팝이 더 인기일 정도다. 드라마를 거의 만들지 않는 프랑스 지상파 방송의 밤시간은 ‘CSI 과학수사대’ 등 미국 드라마가 가득 채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롯된 프랑스의 문화적 위기감이 사상 최대의 자유무역협정인 미국·유럽연합(EU) FTA의 걸림돌로 등장하고 있다.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는 영국 북아일랜드에서 17일(현지시간) 미·EU FTA 공식 협상 착수가 선언됐다. BBC방송에 따르면 발표장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한 세대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큰 상(賞)”이라며 기쁨을 표시했다. 그는 미·EU FTA는 EU에는 1000억 파운드(약 177조원), 미국에는 800억 파운드의 경제적 가치를 불러온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다음 달 미국 워싱턴에서 첫 협상이 시작될 것”이라고 운을 뗀 뒤 뼈 있는 말을 던졌다. “미국과 EU 양측에는 예민한 문제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좁은 이해타산에서 벗어나 큰 그림을 봐야 한다.”

 외신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이 EU에서 진행 중인 일부 산업 제외 논의를 겨냥한 것으로 풀이했다. EU는 지난 14일 프랑스의 시청각산업을 FTA 협정이 효과를 미치지 못하는 예외적 항목으로 남겨 두기로 결정했다. EU와 프랑스는 이날 13시간의 마라톤 회의를 벌였다. 3일 뒤로 예정돼 있던 FTA 협상 착수 발표에 쫓긴 EU가 프랑스의 뚝심에 밀렸다. EU는 “ 다시 논의할 수 있다”는 단서를 남겨 두고 한 발 물러섰다.

 프랑스는 세계무역기구(WTO)도 회원국 정부의 문화보호책은 인정한다며 시청각산업 예외를 주장했다. 정부 보조금 지급, 외국 프로그램 방송 비율 제한 등 보호조항들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정책들은 FTA 협상에서 민감한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EU는 프랑스의 고집으로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27개 회원국이 제각각 농업이나 수산업 등 자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분야의 제외를 주장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그 어떤 분야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는 것이 협상의 원칙”이라고 밝혔다. 파이낸셜타임스는 “프랑스의 반응이 미·EU FTA의 민감함을 표면화했다”고 보도했다. 향후 18개월의 협상이 험난하리라는 예고다.

런던=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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