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 3년 했는데 외부 인사? … KB금융의 '노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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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금융 차기 회장에 내정된 임영록 사장(가운데 카메라 앞)이 열흘째 KB국민은행 노조의 출근 저지 투쟁에 막혀 본사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지난 11일 오전 서울 명동 본사 앞에서 임 내정자가 노조원들에게 가로막혀 있다. [김형수 기자]
이태경
경제부문 기자

서울 명동 KB금융지주 본사에선 벌써 열흘째 출근시간대에 같은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KB금융 최대 계열사인 KB국민은행의 노조원들이 차기 회장에 내정된 임영록 사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벌이는 출근 저지 투쟁이다. 노조의 기세는 등등하기만 하다. 지난 11일 빨간 머리띠를 두른 20여 명의 노조원이 임 사장 출근 전 스피커로 민중가요를 틀면서 현관문을 지켰다.

KB노조 “또 관치에 휘둘릴 것” 주장

오전 9시를 조금 넘겨 도착한 임 사장은 차에서 내려 몇 발짝 걷기도 전에 “임영록은 사퇴하라, 관치인사 물러나라”고 외치는 노조원들에게 막혔다. 결국 임 사장은 이들 앞에서 5분가량을 서 있다가 “3년간 내부 사람으로 잘 근무했는데 이제 와서 관치인사라고 하니 안타깝다”는 심정을 전한 뒤 시내 모처에 마련한 임시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노조가 출근 저지 투쟁을 벌인 건 지난 5일 회장후보추천위원회(회추위)가 임 사장을 회장에 내정한 뒤부터다. 노조는 ‘모피아(재무부+마피아의 합성어)’ 출신의 낙하산 인사가 회장이 돼서는 KB금융이 또다시 관치에 휘말릴 것’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있다. 지난 1일 기자단 산행에서 “관료 출신도 전문성이 있으면 금융지주 회장을 할 수 있다”고 한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사외이사들에게 영향을 줬다는 주장도 한다.

회장 선임 때마다 반대투쟁 관례화

 하지만 노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KB금융 내에서도 많지 않아 보인다. 새 회장이 내정될 때마다 KB국민은행 노조가 반대투쟁에 나선 게 관례화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각각 2008년과 2010년 선임된 황영기 회장과 어윤대 회장도 한 달 넘게 취임 반대 시위를 겪어야 했다. 노조가 실제로 임 사장이 사퇴하길 기대하기보다 ‘회장 길들이기’를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노조가 ‘선거 영향’을 명분으로 삼은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선거에 더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치려 한 건 오히려 노조였다. 노조는 신 위원장 발언이 있기 전인 지난달 30일 성명을 통해 “임 사장은 정통 관료 출신으로 KB 내부에 정통한 인사가 아니다. 진정한 내부 출신이 회장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임 사장을 반대하고 다른 내부 출신 인사를 지지한 것이다. 최종 회추위가 열리기 하루 전인 4일에는 회추위원장을 찾아가 ‘공정선거’를 요구했고, 회추위 당일인 5일에는 ‘내부 인사가 돼야 한다’ ‘임 사장은 내부 인사가 아니다’라는 직원 설문조사 결과를 내놓으며 회추위를 압박했다. 하지만 회추위는 만장일치로 임 사장을 차기 회장으로 택했다.

비정상적 지배구조, 낙하산 논란 빌미

 KB금융 회장 선거 과정은 주인 없는 금융회사의 지배구조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외이사 공화국’이라는 비판을 받던 KB가 ‘관치 논란’에 휩싸였다가 이제는 ‘노조의 권력화’에 휘둘리는 양상이다. 비단 KB금융만의 문제가 아니다. ‘낙하산 논란’이 일 때마다 노조의 존재감이 커져가는 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숱한 공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KB금융과 대부분의 공기업은 주식회사 체제로 운영된다. 결정권을 행사하는 주인이 주주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들 기업의 최고경영자 선임 때 주주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정부가 낙하산 논란의 빌미를 제공하고, 노조가 이를 증폭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가 정상적이지 않은 지배구조가 부른 희극이다. 신제윤 위원장은 취임과 함께 “관치(官治)가 없으면 정치(政治)가 되는 것이고 정치가 없으면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의 내치(內治)가 되는 것”이라며 금융회사 지배구조를 확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요즘 KB금융의 모습을 보면 여기에 ‘노치(勞治)’에 대한 해법도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이태경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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