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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세상탐사] 모두를 만족시키려 한 원세훈 수사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27호 31면

역시 큰 승부에 명국(名局)은 없었다. 국가정보원 선거개입 의혹 수사 얘기다. 검찰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불구속 기소한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검찰로선 대단한 각오와 결심이 필요했다.

 막상 수사 결과 발표 뒤 검찰청사 바깥은 사면(四面)이 초나라 노래 소리(楚歌)다. 민주당은 “면죄부 수사, 축소 수사”라며 황교안 법무부 장관 사퇴를 주장한다. 새누리당은 수사팀의 언론 플레이를 비판하면서 선거법 적용 재검토를 요구한다. 어찌하여 검찰 수사가 이런 곤경에 빠지게 된 걸까.

 그간의 수사 과정을 복기해보면 전체 형국은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다. 착수(着手)는 나쁘지 않았다. 지난 4월 특별수사팀을 꾸린 검찰은 발 빠르게 행마(行馬)를 시작했다. 국정원을 전격 압수수색했고 지휘 라인을 따라 원 전 원장까지 직진했다. 지난달 27일 사법처리 결론을 ‘선거법 위반-구속영장 청구’로 보고했을 때만 해도 무서운 기세였다.

 난국(難局)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원 전 원장 지시를 뒷받침할 직접 증거가 부족하지 않느냐”는 황 장관과 “지금 증거로도 충분하다”는 수사팀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속절없이 2주일이 흐르는 사이 포석(布石)이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결국 공소시효 만료(19일)의 초읽기에 몰렸다.

 “수사는 타이밍”이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검찰이 왜 어이없는 불시착(不時着)을 하게 된 것일까. 수사의 문제점을 몇 개의 바둑 격언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정수정도(正手定道). 바둑 돌로든, 칼로든 사활(死活)의 갈림길에 선 자는 바른 수(法手)로 일관해야 한다. 그래야 져도 후회가 없다. 때론 변칙적인 수도 필요하지만 실력이 늘지 않는다.

 선거법 위반-불구속 기소. 이 결론은 “원칙과 거리가 먼 패착(敗着)”이란 지적을 피하기 힘들다. 국정원장이 정권 안보를 위해 선거운동을 했다면 구속영장을 청구해야 마땅하다. 영장 청구를 고민할 정도로 자신이 없었다면 선거법을 적용하지 말았어야 한다. 야당의 재정신청이 가능해지는 10일까지가 골든 타임이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가부간에 선택해야 했다.

 ‘적극적인 법 적용-소극적인 신병처리’는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이란 파국(破局)을 모면하기 위해 짜낸 묘수(妙手)였다. 그 절충과 타협의 결과 오히려 정치적인 수사임을 보여주고 말았다. “묘수가 빛나는 바둑이란 그동안 불리한 바둑이었다는 반증”(웹툰 『미생』)일 뿐이다.

 다음은 동수상응(動須相應). 행마를 할 때는 이쪽저쪽이 서로 호응을 해야 한다. 수사팀과 황 장관의 이견 밑바닥엔 특수통과 공안통의 시각 차가 도사리고 있다. 채동욱 검찰총장과 윤석열 수사팀장은 특수통이고, 황 장관은 공안통이다. 양쪽은 사건에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특수통이 급소를 깊숙이 파들어 간다면, 공안통은 전체 판을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서로 다른 두 개의 기풍(氣風)이 조화를 이뤘다면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 못한 원인이 황 장관의 정치적 고려 때문인지, 수사팀의 지나친 고집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 판단이 옳았는지는 법원 판결이 판가름해줄 것이다. 분명한 건 검찰 내부의 후유증이 오래갈 것이란 점이다.

 마지막은 반전무인(盤前無人)이다. 바둑판 앞에 사람이 없는 듯 상대를 의식하지 말고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인생은 다면기(多面棋)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과 승부를 겨뤄야 한다. 수사도 다르지 않다. 수사 대상자뿐 아니라 청와대, 여야 정당, 여론과 대국(對局)을 해야 한다.

 그 모두를 만족시키는 수사는 있을 수 없다. 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곁눈질(좌고우면·左顧右眄)하다가 모두가 불만인 상황이 돼버렸다. 재판 결과 역시 가늠하기 힘들다. 재판을 담당할 판사들도 신문·방송에서 증거 판단을 둘러싼 잡음을 접했을 터. 보다 엄격한 잣대로 증거를 들여다볼 가능성이 크다.

 이번 국정원 수사는 검찰 조직이 안고 있는 맹점들을 드러냈다. 내 말이 산 다음에 상대의 돌을 잡으러 가는 법(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 자신의 약점부터 제대로 살펴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모든 과정을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판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 무엇을 노리고, 무엇에 당황하고, 무엇에 즐거워하는지는 판 안의 사람만 모르죠. 밖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데.”(『미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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