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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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K화백이 들려준 이야기다. 그가「파리」에 머무를 때 S씨의"『국화옆에서』를 불어로 변역해서 그쪽 문인들에게 보여 준일이 있었다고 한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하는 시다.
『아아, 한국에선 국화라는 꽃이 그렇군요. 우리 불란서에선 성묘갈때나 꺾어다 묘에 던져놓는 꽃인데….』그때 어이가 없던것은 K화백도 역시 마찬가지었다고 크게 웃었다.
한국 문학은 끝내 한국문학이지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라고 주장을 하게되면 이말은 그럼직도하다. 역시 동양과 서양을 뚝잘라놓고 생각해도 그런 생각은 들어맞는 말이다. 서구의「노벨」문학상이 동양에, 더구나 한국에 수여될리 만무하다는 편에서면 그말은 우선 논리적으로 가능한 것같다.
정신의 양식, 생활양식, 상상의 수용태세. 서구의 토양을 이루는 기독교정신, 철학적인 요소, 더구나 예술 심위인 구원의식에까지 이르면 동양의 작품이 서구인의 심금은커녕, 이해에도 못 미칠것같다.
55년전 인도의 시인「타고르」가「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별로 신기할 것이 없었다. 그는 영어를 구사할수 있었으며 또 바로 그언어로 시를 썼다. 그의 작품을 두고「동양적」이라고 비평하기도 좀 모호한 것이다. 그가「노벨」상을 받은 것은 동양작품에 주어졌다기보다는「동양인」에게 수여되었을 뿐이다.
그반세기만인 1968연도, 그러나 일본작가「가와바다·야스나리(川端康成)씨가「노벨」상을 받은 것은 무언가 우리에게 찬물을 끼얹는 것이 있다.「국화」가 서구인에겐 어떤 의미를 갖는가가 별로 문제시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충분히 동양적인, 아니, 한국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라면 오히려 그것으로 세계문학의 일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와바다」씨는 충실한, 너무도 일본적인 일본작품을 썼을 뿐이지, 그가 서양의 의식구조에 호소될만한 범세계적인 작품을 쓴 것은 아니었다. 동양정신은 그것으로써 높은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그것이 서구인의 정신양식과는 거리가 멀다고 스스로 장막을 치려는 것은 미시적인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문학이「노벨」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렇다고 주어지는 상까지 밀어낼 까닭은 없다. 또한「서구적인 가치」에 의식적으로 집착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우리작가 자신들의 정신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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