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가을 과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오랜만에 시장엘 들렀다. 햅쌀이 나오고 좌판마다 잘 익은 가을 과일들이 풍성히 쌓여 있었다. 사과, 배를 필두로 감, 밤, 대추… 보기만 해도 푸짐한 느낌이 들었다. 더미더미 쌓여 있는 과일 더미 속에서 나는 문득 눈시울이 더워왔다. 올 여름 그 극심하던 가뭄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거북이 잔등처럼 갈라져 흙먼지가 이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시든 초목을 붙들고 우리의 가슴은 얼마나 안타까왔던가? 정든 고향 땅을 등지는 이 농민이 나날이 늘고 무작정 상경하는 소년 소녀들이 어두운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간다는 3면 기사는 또 얼마나 기막히고 우울한 이야기들이 있던가?
참으로 그 가뭄과 조갈은 한 큰 악의와도 같아서 흉하고 무섭기 이를데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허리가 휘도록 물을 자아 올리고 온 국민은 하나같이 마음을 모아 가뭄퇴치에 최선을 다하였다. 정녕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말씀대로 피땀 흘린 값이 헛되지 않아 저토록 소담스런 열매를 여물게 하였나 보다. 고난을 극복하고 얻은 것이기에 한알의 과일을 보면서 느끼는 우리의 감사와 감격도 어느해와는 다르다. 쌀알 한알 한알이 낱낱이 귀하고 사과 볼이 붉은 것이 예사롭게 보여지지 않으며 눈빛 감도 한결 정답다. 진실로 절망하지 않는자는 되 일어날 수 있으며 절망하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철리를 새삼 깨달아 청명한 가을 햇별 속에 섰으려니 내 영혼마저 저 실과들처럼 알차게 아름답게 익어가는가 싶다. 【허영자<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