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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에서 파리를 꿈꿨다, 그러나 실패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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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915 인더스트리 갤러리 스튜디오

사진작가 김용호씨는 유명한 사람이다. 1990년대 상업 사진작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한국 광고’와 ‘하퍼스 바자’가 선정한 올해의 포토그래퍼상을 두 차례 수상했고, 6년간 한국패션사진가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50대에 접어든 지금도 현대카드와 벤츠·현대자동차·페라가모 등 국내외 유명 브랜드의 광고 사진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난달엔 ‘제비다방에 샴팡구락부를 허(許)하라’는 개인전을 열었으며, 최근 국내 유명 사진작가들과 ‘드림 소사이어티전’을 기획했다.

사진가로서의 명성만큼 그를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이력이 그에게 있다. ‘청담동 문화의 선구자’라는 수식어가 드러내듯 초기 청담동 문화를 만든 바로 그 경력 말이다. 청담동 문화를 만들었다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 청담동 ‘카페 드 플로라’를 기억하는 30~40대라면 아마 고개를 끄덕일 거다. 카페 드 플로라라면 1990년대에 “나 좀 잘나가”라던 유명인과 강남 사람들이 섞여 놀던 최고의 잇 플레이스(it place) 중 하나가 아닌가. 카페 드 플로라 주인이 바로 김용호였다.

 본업인 사진작가로서의 유명세나 그 시절 청담동 사교계에서의 위치를 감안하면 그는 지금보다 더 많이 알려졌어야 한다. 그러나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그에 관한 인물정보 하나 없다. 본인이 드러내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는 그의 작업실 ‘915 전방위문화구락부’ 스튜디오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김용호는 “인터뷰, 그래 좋다. 청담동에 관한 거라면. 하지만 내 프라이버시(사생활)에 대한 거라면 싫다”고 단호하게 요구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며칠 뒤 다시 가로수길의 한 와인바에서 만났을 때 그는 비교적 소상한 프라이버시를 털어놓았지만 기사에 담지는 말아달라고 했다.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같은 남자로서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사생활보다는 그가 들려주는 카페 드 플로라 시대가 더 흥미로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1990년대 청담동 문화란.

 “외식문화로 시작했지만 감각적이고 고급스러운 외래 문화를 대중이 향유할 수 있게 된 시기 아닌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카페 드 플로라는 독특했다. 카페지만 연극이나 음악회 같은 문화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프랑스 파리에 마레 구역이 있다. 레스토랑과 갤러리, 패션 부티크 등이 많은 문화 지구다. 파리지앵은 마레 구역을 산책하며 문화적 체험을 한다. 당시 청담동이 마레 구역처럼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 20세기 초 프랑스의 카페 분위기를 늘 동경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 헤밍웨이와 살바도르 달리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지 않나. 이렇게 문화인 모두가 단골이 돼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섞여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당시 카페 드 플로라는 유명 연예인이 많이 찾았다.

 “이정재·김민종·이미연 등 당대 톱스타가 모여들었다. 톱스타가 늦은 오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이곳을 찾은 다른 사람들과 수다 떠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그런 곳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카페 드 플로라에 얽힌 추억도 많겠다.

 “음. 추억이라기보다는 신진 작가 사진전을 무료로 열고 노영심 음악회나 윤석화 연극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면서 보람을 많이 느꼈다. 사실 그게 카페 드 플로라를 열었던 이유이기도 했고.”

-카페 ‘하루에’는 카페 드 플로라와 비슷한 시기,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명성을 날렸다. 두 카페가 생기기 전 청담동은 어떤 곳이었나.

 “그냥 조용한 고급 주택가였다. 내가 청담동에 간 것도 조용한 스튜디오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카페 드 플로라가 처음 생길 때 주민들이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했다. 가게가 들어오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하루는 카페 문을 닫고 친한 연예인들이랑 어울려 테라스에서 술을 마셨는데 주민들이 시끄럽다고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다. 지금과 달라도 많이 달랐다.”

- 그렇게 잘나가던 카페 드 플로라를 왜 그만두게 됐나. (※김용호는 이곳을 싸이 엄마이자 비슷한 시기 청담동에서 레스토랑 ‘시즌스’를 했던 김영희씨에게 넘겼다.)

 “리테일(소매업)은 디테일이더라. 주인이 직접 문을 열고 문을 닫아야 한다. 다른 직업이 있어도 부업이 아니라 전업처럼 해야 한다는 얘기다. 지금은 어디서나 필수가 돼버렸지만 발레파킹을 내가 처음 도입했다. 청담동은 대중교통으로 접근할 수 없는 동네니까 그런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고도 생긴다. 예를 들어 한 번은 눈 오는 날 직원이 값비싼 외제차를 주차시키다 실수로 범퍼를 부숴 수백만원을 물어준 적도 있다. 결국 내가 다 책임져야 한다. 그런 세세한 것까지 다 신경 써야 하니 피곤했다. 부업으로 시작한 건데 본업인 사진 활동에도 지장을 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만뒀다.”

-특별한 공간이었는데 남에게 넘겨줄 때 아쉽지 않았나.

 “그때는 별로 그런 생각을 안 했다. 내가 꽤 잘나가던 때니까. 일이 많았고 본업에 집중하는 게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립다. 이제는 카페 드 플로라처럼 누군가를 자연스럽게 만나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 다 사라졌더라.”

-카페 드 플로라뿐 아니라 하루에나 퓨전 레스토랑 ‘시안’처럼 소위 청담동 스타일을 만든 유명한 장소가 청담동에서 다 사라졌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글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본의 논리로 움직였기 때문이 아닐까. 나처럼 문화를 즐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부분 그냥 장사를 하고 싶어 온 사람이 많았다. 비슷비슷하게 트렌디한 느낌의 식당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부동산 임대료가 치솟았다. 이곳을 찾는 손님은 압구정동 오렌지족(族) 같은 졸부 이미지가 아닌 뭔가 다른 플러스 알파를 원한 건데 정작 가게 주인들은 그런 걸 제대로 읽지 못했다. 파리 마레 지구처럼 대중이 갖가지 고급 문화의 재미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했는데 실패했다. 청담동에 가게를 내는 사람들은 누구든 인테리어만 신경 쓴다. 그걸 보는 재미가 있기는 하니 개업 초기엔 호기심에 찾아간다. 그러면 성공했다고 착각한다. 돈 많은 사람들은 변덕이 심하다. 하다못해 레스토랑과 갤러리를 결합한 공간 같은 것이라도 생겼어야 했는데…. 인테리어에 돈 들인 겉만 번드르르한 곳만 많았다. 쇠락하는 게 당연하다.”

- 그때는 왜 그런 조언을 해주지 않았나.

 “다들 개성이 강했다. 만약 했다 해도 내 충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다. 위기가 닥치기 전엔 조언이 소용없다.”

-누가 당신을 ‘청담동 문화의 선구자’라고 부르던데.

 “내가 내 입으로 그렇게 말해본 적은 없다. 나를 영화 ‘벅시’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한 라스베이거스를 개발했던 벅시 시겔처럼 보는 사람도 있다. 한때는 그런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벅시는 자신이 구상했던 라스베이거스를 만들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는 실패한 것 같다.”

-청담동 스타일이 좋은 평가만 받은 건 아니다. ‘짝퉁 아메리카’라든가 ‘버터맛 나는 허세’라는 비난도 있었다.

 “그렇게 폄하하거나 반발 심리를 가진 사람이 많다. 비난하기 딱 좋은 소재니까. 하지만 흉내가 아니다. 애프터눈 티 마시고 셰익스피어 읽으며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사치스럽게 놀고 쓰자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람의 문화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거다. 전통문화는 인사동이나 삼청동 같은 곳에서 즐기면 되는 거 아닌가. 서울 모든 곳이 전통문화만 재현하면 다들 행복할까. 1990년대는 흉내만 내다가 움츠러드는 게 아니라 자신의 문화적 욕구를 용감하게 드러낸 시기다.”

-사진작가지만 다른 다양한 활동도 한다. 창조적인 생각을 잘 하는 사람인가.

 “남들과 다른 시각이 있는 것 같다. 사진을 찍을 때도 그냥 고객이 원하는 걸 찍어주는 게 아니라 그 브랜드에 맞는 사진을 찍어준다는 평가를 얻었다. 사진작가로서의 엘리트 코스를 걷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 같다.”

-프랑스나 미국 유학을 몇 번은 갔다 왔을 것 같다.

 “전혀. 공부를 열심히 안 했다. 20~30대에는 고향인 부산과 서울을 왔다갔다하면서 방황을 많이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고 덕분에 사고의 영역이 넓어졌다. 먹고 마시는 경험이 지금 활동에 많은 영감을 줬다.”

-젊은 시절 방황으로 얻은 게 있다면 자녀 교육도 남다를 것 같다.

 “아들이 외국에서 공부 중이다. 딱 하나만 가르쳤다. 테이블 매너다. 내가 물려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테이블에서 만들어진다. 잘 입고 좋은 차 타고 이런 건 돈으로 해결되는데, 테이블 매너는 아니다. 음식 먹으며 이야기해 보면 그 사람 깊이를 알 수 있더라. 고급 식당에서 요구되는 테이블 매너는 교양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들이 어릴 때부터 고급 레스토랑에 종종 데려가 매너를 가르쳤다. 지금도 나를 도와주는 스태프들에게 젓가락질 원포인트 레슨을 해주곤 한다. 옛말에 사과 잘 먹는 여자, 떡 잘 먹는 남자랑 결혼하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사람은 집에 행사가 많다는 거다. 손님 많은 집에서 자란 사람은 기본 소양을 갖추고 있다.”

-사진가의 전성기는 30대 초반에서 40대 초반까지라고 하더라. 그 다음엔 감이 떨어진다는데.

 “그런 말에 공감하지 못하겠다. 요즘 공부를 열심히 한다. 인문학 서적과 신문을 열심히 보며 트렌드를 분석한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차를 운전하면 거리의 다양한 풍경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차를 너무 안 타 배터리가 방전되기도 했다. 노 필로소피(No philosophy), 노 크리에이티브(No creative)다. 백남준이 1984년 1월 1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영상전을 전 세계에 방영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빅 브러더를 풍자한 거다. 그런 철학이 있어야 한다.”

-철학도 철학이지만 일단 사진을 잘 찍어야 하지 않나.

 “음악과 달리 사진은 스킬이 별거 없다. 셔터 누르는 거 누가 못하나. 무엇을 찍느냐, 어떤 이야기를 담느냐의 문제다. 이건 시간이 필요한 문제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야 한다. 명작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음미할 수 있는 이야기가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좋은 사진은 자신이 가진 정보와 경험을 조합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도 고객이 나를 찾아오는 거다. 나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유성운 기자

◆좋은 사진작가가 되려면

1. 체력 관리를 꾸준히 해라.

50대에 접어든 지금 아쉬운 게 있다면 체력이다. 무거운 카메라를 계속 들고 다녀야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껴야 하기에 체력이 필수다. 그동안 요가·등산·클라이밍·다이빙 등 어지간한 체력 관리용 운동은 다 해봤다. 요즘은 조금 게을러졌지만 그래도 체력 관리를 위해 집(24층)까지 걸어 올라간다.

2. 신문을 열심히 읽어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문을 읽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신문이랑 인터뷰한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신문을 읽어야 세상의 중요한 흐름을 알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시각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좋은 사진작가가 되려면 세상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주문하는 대로 찍어주면 좋은 사진작가가 될 수 없다. 나는 지금도 신문을 보면서 좋은 칼럼은 꼭 스크랩해 두고 여러 차례 읽는다.

3. 많이 놀고 많이 즐겨라.

많이 즐겁게 놀아봐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많아진다. 지난해 8월에 현대카드 광고사진만 모아서 ‘우아한 인생’이라는 사진전을 했다. 반응이 좋아서 전시회를 하자는 요청이 늘었다. 그 사진들에는 모두 내가 젊은 시절 놀던 경험이 농축돼 있다. 아마 모범적인 사람은 생각하기 어려운 아이디어였을 거다.

김용호가 찍은 현대카드·현대차 광고사진

◆김용호

1957년 56세 부산 출생

1993년 월간 ‘한국광고’ 선정 올해의 포토그래퍼상·광고대상

1994년 대한민국광고대상 은상

1996년 청담동 ‘카페 드 플로라’ 오픈

1998~2004년 한국패션사진가협회 회장

2002년 패션지 Happer’s Bazzar 선정 올해의 포토그래퍼상

2003년 개인전 ‘한국문화예술명인전’

2007년 개인전 ‘몸mom’

2013년 개인전 ‘제비다방에 샴팡구락부를 許하라’

[삶]

사는 곳: 방배동 서래마을

근무하는 곳: 신사동 915 전방위문화구락부 스튜디오

장 보는 곳: 반포동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자주 가는 식당: 팔레 드 고몽(프랑스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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