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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 버릴 수 없는 것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24호 28면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서로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을까. 영원처럼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실은 삼사 초 동안에 불과했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어떤 신비로운 교감에 의해 손가락이 서로 엉켰다. 이어서 찰스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열정적으로 사라를 끌어안았다. 두 입술이 서로 부딪쳤다. 둘 다에게 충격을 줄 만큼 거친 입맞춤이었다. (…) 그와 그녀의 알몸 사이에는 한 겹의 얇은 잠옷밖에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참아 온 갈증으로 그녀의 입술을 빨면서, 그녀의 몸을 가슴에 끌어당겼다. 그 갈증은 단지 성적 욕망만이 아니라, 낭만과 모험, 죄악, 광기, 야수성 같은 금지된 모든 것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었다. ”

강신주의 감정 수업 <36> 욕망

마침내 여자와 남자는 격렬하게 서로 몸을 섞는다. 여자는 프랑스 중위와 놀아나다가 버려졌다고 손가락질 받던 사라였고, 남자는 귀족 삼촌의 상속자이자 어니스티나라는 부유한 집안의 외동딸을 약혼녀로 두고 있던 찰스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너무나 강렬하게 발생하고 만 것이다. 현실화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제약과 고통이 따르는 사랑에 몸을 맡기는 두 남녀의 운명이 어떻게 비극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존 파울즈(John Fowles, 1926~2005)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고, 프랑스와 그리스 등지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했다. 카뮈,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철학과 누보로망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처녀작 『컬렉터』(1963)에서의 대담한 주제와 파격적인 결말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고, 『마법사』(1966)는 걸출한 상상력과 혁신적인 서술 기법으로 히피 세대의 필독서가 되었다. 특히 『프랑스 중위의 여자』(1969)는 영국 현대 문학사에서 전후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 자리 잡은 고전이다.

1969년 출간된 존 파울즈의 장편소설 『프랑스 중위의 여자(The French Lieut enant’s Woman)』는 표면적으로 두 남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노래하는 단순한 연애소설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그런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사랑이란 감정을 통해 인간의 본질, 그러니까 욕망이란 문제와 아주 진지하게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야 사라와의 격렬한 정사에서 찰스가 충족하려고 했던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분명해진다. 찰스는 “성적 욕망만이 아니라 낭만과 모험, 죄악, 광기, 야수성 같은 금지된 모든 것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을 채우려고 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욕망의 윤리학자 스피노자의 이야기를 잠시 경청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욕망(cupiditas)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감정(affectione)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된다고 파악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essentia) 자체다.(…)욕망은 자신의 의식(conscientia)을 동반하는 충동(appetitus)이고, 충동은 인간의 본질이 자신의 유지에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다.”(스피노자의 『에티카』중)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이성에서 윤리학을 시작하려고 할 때, 스피노자는 욕망에서 자신의 윤리학을 시작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지닌 혁명성이다. 대부분의 윤리학자들이 스피노자를 그토록 비난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전체 사회를 위해 개인의 욕망은 통제되거나 절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까.

이렇게 전체 사회의 입장에서 자신의 욕망을 검열하는 것이 바로 ‘이성’의 역할이다. 결국 이성의 윤리학은 사회의 윤리학이지 ‘살아 있는 나’의 윤리학일 수는 없다. 스피노자가 복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 ‘살아 있는 나’를 위한 윤리학이었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존재이고, 당연히 나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과는 맞서 싸우는 존재다. 만일 욕망이 억압되어 끝내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살아도 죽은 것과 진배없는 것 아닐까.

욕망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 인간은 혼자만의 힘으로 삶을 유지하거나 행복하게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타자가 우리의 삶에 이로움, 그러니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 즉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있으니까. 행복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에서 기쁨의 감정이,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서 슬픔의 감정이 찾아올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슬픔의 감정을 피하고 기쁨의 감정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질인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욕망을 긍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복원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제 찰스가 사라라는 여자에게 몰입한 이유가 분명해진다. 사라는 자신만의 욕망을 회복하려고 발버둥치는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의 다음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가감이나 수정을 가할 필요가 없는 진솔하고 단순한 책과, 겉은 그럴듯하게 꾸몄지만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엉터리 책의 차이, 사라는 친절하게도 그 점을 애써 감추고 있었지만, 그것이 바로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모순이고 차이였다.”

사라가 손가락질을 받았던 이유는,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을 찰스는 무의식적으로나마 간파했고, 자신도 그것을 욕망했던 것이다. 과연 찰스는 자신과 사라 사이의 간극, 혹은 모순을 극복할 수 있을까?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라에게 집착할수록 찰스는 결코 사라 옆에 나란히 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욕망을 되찾을 때에만 사라와 제대로 만나게 되리라는 것, 찰스는 이 사실을 과연 깨달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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