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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 살고 지고…] (2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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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광장에서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 최인훈

새벽이 오고 있었다. 피를 먹고 자란다는 자유의 나무가 4.19 혁명으로 잎을 피우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농촌에서 사람들은 낯빛을 새로 고치고 나섰고 문학동네에도 새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6 잡지 '동광'을 펴냈던 주요한은 환도가 되자 54년 그 속간으로 '새벽'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4.19 혁명이 일어난 다음 김재순에 의해 '새벽'은 본격 종합잡지로 편집체제를 바꿔 젊은 지성들에게 바짝 다가선다.

혁명의 새 옷을 갈아입는 잡지를 만들겠다고 쿵쾅거리던 신동문은 장면 정부가 들어선 60년 9월 최인훈을 만나 그가 쓴 2백자 원고지 6백장 분량의 '광장'원고를 받아든다.

"운명이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 합시다"로 시작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신동문의 가슴은 사뭇 요동쳤고 단숨에 읽기를 끝낸 그는 자기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귀로 들어야 했다. "이제야 한국소설의 새벽을 만나는구나."

원고지 60,70장 안팎의 단편소설로 승부를 걸던 그 무렵에 '광장'은 길이로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어느 작가도 손대지 못한 분단상황의 핵심을 파고드는 주제의식은 섬뜩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여느 편집장이었으면 몇 날쯤은 망설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동문은 시퍼런 편집자의 안목 위에 소신을 밀고나가는 담력이 있었다.

편집이 끝난 '새벽' 11월호에 싣기 위해 원고보따리를 들고 인쇄소로 달려가 밤을 새워 조판을 지켜보고는 날이 밝아서야 OK를 놓고 집에 돌아와 잠에 들었다.

소설'광장'은 신동문의 예측대로 단번에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 서울신문 11월 7일자에 백철은 남북통일론에 대한 커다란 암시와 실험의 사실을 짚어내면서 "침체된 문학계에 하나의 돌을 던진 작품"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시대적 명제의 소설에 목말라하던 젊은 지성들은 오랜 가뭄 끝의 집중호우를 맞은 듯 흠뻑 젖고 있었다.

최인훈은 36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나 원산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6.25를 만나 그해 12월 원산항에서 LST해군함정을 타고 남하한다. 서울대 법대 졸업 한 학기를 앞두고 군에 입대,통역장교로 있던 59년 '자유문학'에 '그레이구락부 전말기'등으로 데뷔, 1년 만에 '광장'을 터뜨린 것이다.

먹구름이 잠깐 걷혔던 4.19와 5.16의 사이에 기습적(?)으로 '광장'은 햇빛을 본 것이다. 몇 달만 출산이 늦었더라도 시퍼런 군사정권의 칼날을 막지 못했을 것이었다.

5.16으로 '광장'에 대한 논의가 중단되었지만 그 생명력은 시대의 파고를 넘어 더 사납게 타고 오르며 오늘까지 1백36쇄를 찍어 우리 문학작품으로서는 신기록의 행진을 하고 있다.

그동안 작가는 이 작품을 고쳐쓰기 여섯 차례. 주인공 이명준이 남과 북 어느 쪽도 아닌 제3국 인도를 선택했다가 죽음에 이른 민족사의 화두는 오늘도 바람 부는 광장에서 절규가 되어 맴돌고 있다.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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