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현실주의 다짐한 민주당, 행동으로 보여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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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민주당이 ‘을(乙)’을 위한 민주당이 되겠다고 연일 다짐하고 있다. 그제 광주에선 ‘을을 위한 민주당 광주선언’까지 했다. 지리멸렬했던 민주당이 김한길 대표 체제로 정비되면서 나온 자기 혁신 선언이다. 안철수 신당의 압박 속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광주선언엔 눈길이 가는 약속들이 담겨 있다. 국민을 섬기는 겸손한 정치를 약속했다. 교조주의적 정치와도, 국민에게 무조건 따라오라고 군림하는 식의 정치와도 결별하겠다고 했다. 선악(善惡)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국민 속에서 배우는 정치를 하겠다고도 했다. 민주당의 오래된 병폐인 분열주의와 계파주의 정치도 청산하겠다고 했다.

 성장과 복지, 평화와 안보를 함께 추구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선순환을 이끄는 경제민주화와 지속가능한 복지를 부단히 지향하고 원칙 없는 포퓰리즘과 실현 가능성이 낮은 포퓰리즘, 선정주의 정치와도 담을 쌓겠다고 했다. 그 결과가 ‘각자 땀 흘린 만큼 잘사는 대한민국’이란 거다. 그간 왼쪽으로만 움직였던 민주당이 모처럼 내보인 현실주의 노선이다.

 민주당이 비로소 친노(親盧)니, 비노(非盧)니 싸우느라 대안 정당으로서 모습을 보이지 못한 일종의 ‘불모(不毛)의 흥분’ 상태에서 벗어나는 듯하다. 옳은 방향이다. 이제는 행동으로 옮길 때다. 명실상부한 ‘내일의 여당’으로 거듭나야 대통령도, 여당도 긴장하고 제대로 할 게 아닌가. 그래야 국가와 국민에게도 이익이 된다.

 다만 한 가지 지적은 해야겠다. ‘을’이란 표현이 남발되고 있다. 광주선언(1600자) 중엔 여덞 번이나 등장했다. 5·18 광주정신을 두고 “오늘날 갑(甲)인 경제권력에 아파하는 ‘을을 위한 경제민주화’로 우린 믿는다”고까지 했다. 최근 불거진 갑을 논란을 염두에 둔 듯한데, 대중추수주의의 부박(浮薄)함이 엿보인다.

 자칫 민주당의 을 노선이 편을 갈라 갈등을 조장하곤 했던 구습(舊習)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도 있다. 민주당은 노무현 정부 때엔 2 대 8로, 지난 대선에선 1 대 99로 편가르기를 했었다. 며칠 전 지도부가 국립현충원을 참배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만 들렀던 터 아닌가.

 ‘모든 을’을 위하겠다는 건 공허한 수사일 수 있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가. 현실 세계에선 누군가에겐 갑인 존재가 다른 누군가에겐 을이다. 대기업 1차 협력업체가 을처럼 보이지만 2차 협력업체엔 갑이듯 말이다. 주택 소유주와 하우스 푸어는 또 어떤가. 경직된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현실이 보인다. 진정한 현실을 봐야 실현 가능한 대안이 나오고, 유권자들이 민주당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후보는 괜찮은데 민주당은 못 믿겠다”는 질곡에서도 벗어날 수도 있다.

 김한길 대표는 선출된 직후에 “60년을 지켜온 민주당의 영혼만 빼고 모든 것을 버려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했다. 진정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