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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깔 뻔한 경부선 철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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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

얼마 전 베어링이라는 영국계 금융회사의 기자간담회에 갔다가 엉뚱한 대목에 눈이 갔다.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하려고 넣은 구절인 듯한데, 1900년대 초 한국의 경부선 사업을 따낼 뻔했다는 대목에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베어링은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사들일 때 자금을 빌려준 회사로 알려져 있다. 이 회사는 20세기 초 철도산업에 주목했다. 미국·러시아·아르헨티나 등의 철도사업에 참여해 큰돈을 벌었다. 조선의 철도사업도 좋은 돈벌이 기회로 다가왔을 것이다.

 베어링의 명령으로 당시 조선에 파견된 윌리엄 비셋 경은 조선의 지형을 조사한 뒤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런던 소재 베어링 기록보관서에서 받아본 자료는 놀랍다. ‘Seoul-Fusan R’이라고 시작되는 문서에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각 지역의 지형과 특징, 터널 적합 위치 등을 정밀하게 측정해 놨다. 경부선이 세워질 경우 예상되는 도시별 수혜산업도 정리돼 있다. 이렇게 만든 경부선 노선도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안 노선도 제시해 놨다. 베어링의 야심은 HSBC까지 끌어들여 성사 단계까지 갔지만 결국 일본의 등장으로 무산됐다.

 자본은 이처럼 더 큰돈을 찾아 국경도 훌쩍 뛰어넘기 마련이다. 조선의 철도까지 들여다봤던 베어링처럼 한국의 국민연금도 매력적인 해외 투자처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 한데 속도가 너무 느리다. 규모로는 적립금 400조원을 넘긴 세계 3대 연기금으로 성장했지만 아직 85%가 국내 투자다. 해외투자 중에서도 부동산 등 대체투자 비중은 이제 3%대에 불과하다. 외국 빌딩 매입 소식이 간혹 들리지만 큰 재미를 봤다는 얘기도 못 들었다.

 반면에 국내 시장에선 이미 비대해진 ‘울트라 수퍼갑’이 됐다. 벌써 국내 상장기업 220개 회사에 대해 지분 5% 이상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2465조원까지 몸집을 불릴 국민연금은 큰 입 벌린 블루길처럼 국내 기업의 주식과 채권을 삼킬 참이다.

 국민연금이 국내 기업에 투자하는 걸 나무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2044년부터 적자로 돌아선다. 그리고 2060년이면 기금은 모두 소진된다. 이 과정에서 국민연금이 국내 주식과 채권을 팔아 치우며 일으킬 시장 충격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작은 연못에서 폼 잡고 있는 ‘수퍼 고래’는 하루빨리 대양(大洋)으로의 진출을 서둘러야 한다. 제주 앞바다에 뛰어들 날을 기다리며 물고기 잡는 훈련을 하고 있을 서울대공원 제돌이처럼 큰 물에서도 살아남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성공 사례를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맥쿼리라는 호주 자본은 우리나라 민자사업 초기에 인천공항 고속도로를 깔아놓고 10%대의 투자 수익을 올리고 있다. 치밀한 전략과 준비, 과감한 해외 투자가 있기에 가능했다. ‘Nak-Tong Kang(낙동강) 198마일에 1400피트 다리 건설, Zenrado Kunsan(전라도 군산)과의 연계성…’. 110년 전 무명의 변방국가인 조선 산천을 누비며 남긴 비셋 경의 메모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윤창희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