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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밀린 24조원 원전 수주 … 그 뒤엔 71위 금융경쟁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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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이달 초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원자력발전 건설사업 계약에 서명했다. 한국이 3년여간 공들인 220억 달러(약 24조원) 규모의 터키 원전 사업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2010년 6월 한국은 원전사업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면서 일본과의 경쟁에서 한발 앞서 갔다. 하지만 금융 경쟁력이 발목을 잡았다. 4기의 원전을 지으려면 70%가량을 프로젝트파이낸싱(PF)으로 조달해야 하는데, 국내 금융회사는 자본력과 경험이 부족했다. 조달금리도 한국은 일본보다 1~2%포인트 높은 수준을 제시했다. 김기환 서울파이낸셜포럼 회장은 “국내 금융산업이 제조업에 비해 낙후돼 있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며 “새로운 성장동력과 일자리를 만드는 창조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선 한국 금융의 체질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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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업의 ‘혈맥’ 역할을 하는 금융은 부가가치와 일자리 창출 효과가 큰 산업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주소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세계경제포럼에 따르면 한국의 금융 경쟁력은 144개국 중 71위, 자율성은 114위(순위가 낮을수록 정부 규제가 많음)에 불과하다. 한국의 국가경쟁력(19위)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에, 삼성전자·현대차 등 글로벌 대표기업이 대거 포진한 한국에서 국내 1위 금융회사의 세계 순위는 51위(신한금융그룹, ‘더 뱅커’지 선정 글로벌 500대 금융 브랜드)에 머물러 있다. 김수룡 한국도이치은행그룹 회장은 “해외 M&A(인수합병)·PF 등 한국 기업의 글로벌 금융서비스 수요조차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는 스스로 초래한 결과란 지적이 많다. 제조업이 해외 진출을 통해 외화 획득에 나설 때 금융회사는 손쉬운 국내 영업에만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13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은행이 예금과 대출이자 차이로 벌어들인 돈이 전체 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0%로 전년(82.1%)보다 높아졌다. 장기적 성장동력을 찾기보다는 독과점 지위를 이용한 예대마진 수익에 치중했다는 얘기다.

 일부 금융회사들은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으나 아직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이다. 국내 은행들의 해외 점포 당기순이익은 은행권 전체 당기순이익의 약 7%에 불과하다. 일본 주요 은행(26%, 2011년 기준)에 한참 못 미친다. 은행을 제외한 다른 국내 금융회사들은 아예 적자다. 해외 점포 자산이 총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해 상반기 기준 은행 3.9%, 증권사 0.8%, 생보사 0.1%, 손보사 1.2%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요즘 같은 내수 침체기에 수익성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국내 61개 증권사의 2012회계연도 상반기 순이익은 6745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1조2404억원)의 반토막이 났다. 국내 은행들의 올해 1분기 당기순이익도 1조8000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3조3000억원)의 절반으로 쪼그라들었다. 내수의존도가 높은 보험·카드업계도 저금리·저성장에 신음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병윤 금융연구원 부원장은 “국내 금융사의 수익 창출 능력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 더 문제”라며 “해외시장 진출을 통한 새 수익원 확보, 고령화 진행에 따른 연금시장 역량 강화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금융경쟁력 약화엔 경쟁국에 비해 많은 규제와 정치권의 ‘외풍’도 한몫하고 있다. 러스 그레고리 한국 맥쿼리증권 대표는 “외국인 투자자는 북한의 핵위험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론스타 사례 등에서처럼 각종 자본 규제와 진입장벽을 한국의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열린 ‘한국의 미래와 금융 개혁’ 세미나(서울파이낸셜포럼 주최)에서 국내외 금융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직면한 문제로 성장 둔화, 실업률 증가, 분배구조 악화, 외부 충격에 대한 취약성 등 네 가지를 꼽았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금융 산업의 경쟁력 강화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금융개혁 과제로 ▶금융산업 발전을 통한 고부가가치 고용 창출 ▶고령화 상품 개발 및 연금제도 개선을 통한 금융의 복지 증진 기능 강화 ▶투자은행(IB) 역량을 갖춘 글로벌 금융회사 육성 ▶덜 경직적이며 선제적인 규제 패러다임 개혁 등을 제시했다.

 특히 정부의 창조경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창조금융의 씨앗이 뿌려져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예컨대 지식·기술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금융 여건을 만들고, 크라우드 펀딩과 같은 새로운 창업자금의 원천을 발굴해 창조적인 혁신기업들을 키우자는 것이다.

 이종구 김&장 법률사무소 변호사(전금융위원회 상임위원)는 “금융산업이 그간 정부의 감독과 보호 속에 지내다 보니 창의성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며 “해외시장의 큰손인 국민연금을 활용해 금융회사의 해외 진출을 늘리는 등 단계적으로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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