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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지방세력에게 본관·성씨 주고 충성을 얻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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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호 26면

안동 김씨와 권씨·장씨 시조의 공덕을 새긴 비석. 이황의 삼공신묘기를 바탕으로 1805년 김희순이 비문을 지었다. 안동시 북문동에 있다. [중앙포토]

고려 후기 유학자 이색(李穡)은 지금의 안동 권씨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고려사의 재발견 태조 왕건 ⑧ 본관제(本貫制)

“권씨는 김행(金幸)에서 시작하는 신라의 대성이었다. 김행은 복주(福州*안동)를 지켰는데, 태조가 신라를 치려고 복주에 왔을 때 김행은 천명이 그에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그에게 고을을 바치고 항복했다. 태조가 기뻐해서 ‘권’이라는 성을 내렸다.”(『목은문고』 권16 현복군 권공 묘지명)

왕건은 후삼국 전쟁의 향배가 걸린 고창(古昌*안동)전투에 승리하자, 승리에 협조한 김행에게 권씨라는 성을 주었다. 이어서 고창을 ‘동쪽지역이 평안하게 됐다’는 뜻의 ‘안동(安東)’이란 이름으로 바꾼다. 김행에게 권이라는 성과 함께 안동을 본관으로 주었던 것이다. 김행과 함께 왕건을 도운 김선평과 장길도 이때 각각 안동 김씨와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된다.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권·김·장씨는 여기서 출발한다.

왕건이 남쪽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지금의 남한강에 이르자, 서목(徐穆)이란 사람이 ‘이섭(利涉: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주다)’했다고 해서 그곳을 이천(利川)군으로 명칭을 바꾼다(『고려사』 권56 지리1 이천군조). 이천을 본관으로 한 서씨 또한 이로부터 유래한다. 왕건이 지방의 유력자에게 성과 본관을 준 대표적인 예다.

1 고려 때 주민등록증 역할을 한 ‘준호구’. 소지한 사람과 배우자의 4대 조까지 본관과 성이 기록돼 있다. 2 안동 김씨ㆍ장씨ㆍ권씨의 시조들(삼태사)이 썼던 것으로 알려진 구리 도장과 도장함.

고려 왕조 때부터 본관·성씨 보편화
대한민국 국민은 대부분 본관과 성을 갖는다. 본관은 시조의 거주지나 근거지 지명을 따서 만들어진다. 성은 시조의 혈통을 표시하거나 같은 혈통을 다른 혈통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호칭이다. 대를 내려가 수십촌으로 촌수가 멀어져도 같은 본관과 성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동족(同族)으로서의 유대의식을 갖는다. 본관과 성을 갖는 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김행의 경우와 같이 삼국의 왕족과 지배층은 일찍이 중국과 교류하면서 성씨를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관과 성이 일반인 차원에서 보편화된 건 고려왕조 때부터다.

약 540가문의 계보를 싣고 있는 『씨족원류(氏族原流)』(조종운(1607~1683) 편찬)에서 이씨(李氏)를 예로 들면, 이씨의 본관은 60개가량 된다. 그 가운데 지금의 경북 성주지역을 본관으로 한 이씨는 경산(京山)ㆍ벽진(碧珍)ㆍ광평(廣平)ㆍ성산(星山)ㆍ성주(星州) 등 5개다. 성주는 신라 경덕왕 때 성산으로 불렸다가 그뒤 벽진으로 바뀌었고, 고려 태조 23년(940) 때 경산, 경종 6년(981) 때 광평, 충렬왕 34년(1308) 때 성주라 각각 불렸다. 성주 지역을 상징하는 이씨 5개 본관은 모두 고려 때 정해진 군현 명칭을 따르고 있다. 이 가운데 신라 경덕왕이나 고려 초기 때 정해진 명칭을 본관으로 사용한 경우가 가장 이른 시기의 본관이다.

전체 약 60개의 이씨 본관 가운데 절반이 철성(鐵城*철원)·재령(載寧)·전의(全義*연기군 전의면)·우계(羽溪*강릉 옥계면)·조종(朝宗*가평) 등 고려 때 군현이었다가 없어진 경우다. 지금도 남아 있는 경주·전주·광주 등의 본관도 고려 때 처음 정해진 군현 명칭이다. 『씨족원류(氏族原流)』에 나온 다른 성들의 본관 명칭도 이런 경향을 따르고 있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ㆍ1690~1752)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신라가 말기에 중국과 교류하면서 처음 성씨를 만들었으나, 벼슬을 한 사족(士族) 정도만 성씨를 가졌고 일반 백성은 갖지 않았다. 고려 때 비로소 중국의 씨족제도를 모방하여 성씨를 반포하면서 일반 사람들도 성을 가지게 되었다.”(『택리지(擇里志)』 ‘총론’)

정곡을 찌른 얘기다. 본관은 이같이 고려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태조 왕건 때 제도화됐다. 왕건은 후삼국 통합전쟁 도중 고려왕조에 협력한 지방 유력 계층에게 성씨와 함께 그들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주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940년(태조23)에는 이를 전국으로 확대해 실시한다. 이 정책을 ‘토성분정(土姓分定)’이라 한다. ‘토’는 지역·지연의 뜻을 가진 본관을 뜻하고 ‘성’은 혈연의 뜻을 가진 성씨를 각각 뜻하는데 고려 때 본관과 성씨를 합쳐 토성이라 한 것이다. 토성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했다. “토성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일정한 토지를 주어 나라를 세우게 하고, 성을 주어 종족을 세우게 하는 것”(『서경』 우공조)이라는 얘기다. 토성은 천자가 제후에게 행하는 의례인데, 이때 성은 제후의 출생지나 나라 이름을 따라 정해진다(이수건, 『한국의 성씨와 족보』). 예컨대 춘추시대 정(鄭)·송(宋)·오(吳)는 나라의 이름이면서 제후의 성이 된다.

태조는 ‘토성분정’을 시행한 940년에 전국의 군현 명칭을 개정한다. 이 조치는 본관과 성을 정한 토성분정 정책을 보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런 예를 잘 보여주는 것이 당시 경주에 대한 군현 개편이다.

“태조 18년(935)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자, 나라를 없애고 그곳을 경주(慶州)라 하였다. (태조) 23년 경주의 관격(官格)을 대도독부로 삼았다. 또한 경주 6부의 이름을 고쳤다.”(『고려사』 권57 지리2 경주조)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에 고무된 왕건은 신라 수도 계림을 ‘경사스러운 고을’이라는 뜻의 경주(慶州)로 명칭을 바꾼다. 940년(태조23)에는 경주를 대도독부로 격상시킨 뒤 6부의 명칭을 고치고 각각 토성을 분정했다. 중흥부(*李)ㆍ남산부(*鄭)ㆍ통선부(*崔)ㆍ임천부(*薛)ㆍ가덕부(*裵)ㆍ장복부(*孫)가 그것이다.

경주의 예와 같이 940년 군현 명칭 개정은 해당 지역 유력층의 비중과 전략적 중요성, 교통·생산의 중요성 등을 고려해 경·목·도호(도독)부·군·현·향·부곡과 같이 군현의 격(본관)을 정했다. 따라서 본관이 어느 지역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위상이 결정됐다. 왕건이 발해 세자 대광현에게 고려 왕족의 성인 왕씨를 준 것은 그만큼 대광현의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서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군현마다 토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940년(태조23)에 확정된 본관과 성씨의 기록이다. 안동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권(權)·김(金)·장(張) 외에 강(姜)·조(曹)·고(高)·이(李) 등 모두 7개 성씨가 안동을 본관으로 한 토성이다. 토성이 기록된 곳은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선의 이남 지역, 즉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의 영역 내 군현이다. 고려 때 토성이 제정된 것임을 뒷받침한다.

시행 100년 지나며 일반 양인으로 확산
왜 왕건은 이런 정책을 시행했을까? 그의 독창적인 정책은 아니다. 중국 당나라 제도를 참고해 만든 것이다. 중국 위진 남북조 때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이 시행됐다. 중앙에서 파견된 중정(中正)이란 관리가 지방 인물의 재능과 덕행을 보고 1품에서 9품의 향품(鄕品)을 정해 추천하면, 그에 해당하는 중앙 관직이 지방 인물에게 주어졌다. 대체로 영향력 있는 유력자의 자제가 높은 향품을 받게 된다. 자제는 이를 바탕으로 지역(郡) 내 유망한 족속이라는 뜻의 ‘군망(郡望)’으로 행세하면서 문벌을 형성한다. 천하를 통일한 당나라는 기득권층이 된 문벌의 군망을 줄이고, 통일에 협조한 신흥세력에 성씨를 주어 권위를 높인다. 또한 전국 유력세력과 그들의 성씨를 기록한 『씨족지(氏族志)』와 『군망표(郡望表)』를 편찬한다. 문벌을 억제하고, 천하 통일에 협조한 신흥세력의 도움을 얻어 황제체제를 강화하려는 정책이다.

토성분정 정책은 이 같은 당나라 제도를 모델로 했다. 왕건은 박씨와 김씨가 성골과 진골이 되어 정치·경제를 독점한 통일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를 무너뜨리고, 소외된 지방 유력층에 토성을 줌으로써 새 지배층에 편입시켜 신왕조 질서 수립에 도움을 얻고자 했다.

이 정책은 단순히 지방세력에 본관과 성씨를 부여하는 친족제도가 아니라, 반세기에 가까운 내란으로 분열된 지역과 민심을 통합하려는 고려판 사회통합정책이다. 학계에서는 이 정책을 ‘본관제(本貫制)’라 부른다.

초기에 토성을 받은 계층은 지방 유력층으로 백성(百姓)층이라 한다. ‘백성’은 보통 사람들이란 지금의 뜻과 다르게 성씨를 받아 지배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이라는 뜻이다. 이들을 당시 ‘유망한 족속’이라는 뜻의 망족(望族)으로 불렀다. 중국의 군망(郡望)과 같은 뜻이다. 당나라 제도를 수용한 증거가 이러한 용어에도 반영되어 있다.

958년(광종9) 과거제 시행은 본관과 성씨 사용이 일반인 계층까지 확산된 계기가 되었다. 1055년(문종9) ‘씨족록(氏族錄)’에 실려 있지 않은 사람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氏族不付者 勿令赴擧; 『고려사』 권73 선거 과거)가 내려졌다. 초기에는 과거 응시 자격이 지방 유력층인 향리층 이상에게만 주어졌지만 과거가 시행된 지 100년이 지나면서 씨족록에 성씨와 본관이 등록된 일반인에게도 응시가 허용됐다. 그러면서 성씨와 본관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대체로 11세기와 12세기를 거치면서 노비를 제외한 일반 양인들이 지금과 같이 성씨와 본관을 갖는 게 보편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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